AI 교과서 결국... '교육자료'로 격하, AI 교과서 '교육자료로 하향' 국회 통과, AI 교과서 결국 교과서 지위 박탈, AI 교과서 '참고서'로 강등 도입 두 달 앞두고 무산되나, 'AI 교과서' 아닌 '참고서' 수준 격하, 'AI 교과서' 교육자료로 강등, AI 교과서, '교육자료'로 격하, '교육자료' 된 AI 교과서 혼란
이런 제목만 보면 AI “교과서”가 되면 교사들은 꼭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쳐야 하는 의무, 당위성이 있는 것 같고, “교육자료”는 선택적, 부분적, 자율적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교사는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을 중심으로 수업 기획과 구성, 실행한다. 그 기준에 따라 평가도 한다. 그게 교육과정대로다. 그래서 교사에게 교과서도 ‘교육자료’ 가운데 하나다. 교육과정에 맞춰 짜인 첫 번째 교육자료가 ‘교과서’인 셈이다. 교사는 이 교과서를 참고해 지역 특색, 반 아이들 특성, 흥미와 관심에 따라 재구성해서 가르친다. 재구성할 게 별로 없다면 그대로 쓰기도 한다.
지금 논란이 이는 AI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격하, 강등한다는 말은 모두 교육과정 문해력이 떨어지는 말이다. 교과서가 되든 교육자료가 되든 교사에게는 모두 하나의 ‘교육자료’일 뿐이다. 마치 ‘교과서’가 되면 꼭, 필수로 가르쳐야 하는 교재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건 아니다.
교사에게는 ‘교육과정’을 보고 가르친다. 지금 논란이 되는 ‘교과서’라는 말을 ‘교육과정’이라고 고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교사는 교육과정 문서(총론, 각론)를 가지고 성취 기준에 맞게 지역 특성, 학생 흥미와 관심, 수준 등을 고려해서 가르친다. 그 가운데 참고하는 교육자료로 “교과서”가 있다. 교육부에서 교육과정을 잘 다루는 분들로 구성해서 각 교과 성취 기준에 맞게 단원별, 주제별로 하나의 본보기 과정을 만들어 준 셈이다. 교사들이 모두 일일이 만들 겨를이 없으니 이렇게 형태를 잡아 본보기로 만든 게 ‘교과서’다. 교사는 교과서 그대로 쓰기도 하고, 학교 또는 반 아이들 환경, 흥미, 관심 등을 고려해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조절(재구성)해서 가르치기도 한다. 그것은 교사의 전문성, 자율성에 달려 있다. 어느 한 방법만으로 강요할 수 없다. 교사가 교육과정에 맞춰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해치면 안 된다.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피드백)으로 교육과정 문해력을 갖춘, 교사 교육과정을 잘 운영하는 교사에게는 지금 논란이 참 의아해할 것이다. 교육과정 문해력이 떨어지는 말이란 것을 다 알 것이다.
전문적학습공동체! 줄여서 “전·학·공”이란 이름으로 학교마다 참 다양하게 해석하고 실천하고 있다. 다모임(다 같이 모임) 가운데 하나로 부장 회의 또는 같은 학년 모임(회의) 겸, 취미 동아리 정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전·학·공의 본래 목적과 목표는 어디 가고 현실 문제(어려움)에 맞닥뜨려져 형식만 따르고 업무 가운데 하나로 변질되기도 한다. 늘 바쁨, 관성의 벽을 넘지 못해 형식적 참여라는 무한 반복의 울타리를 맴돌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목적에 맞게 수업을 나누며 교사 성장을 살찌우는 학교도 많다. 전·학·공의 출발은 배움 중심 수업, 수업 나눔, 교사 성장, 교육의 본질을 살리는 학교문화 만들기에 있다. 본래 취지와 품은 뜻은 누구나 공감하는 철학이 담겼다. 자율성과 주도성이 없다면 결코 전·학·공은 살아남을 수 없다. 전·학·공을 강제할 수 없다. 강제하면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성장보다 거부와 반항이 먼저 자란다. 그렇다고 자율성, 주도성을 위한 오랜 기다림에 자의적 해석, 업무 편의적 참여와 형식에만 빠지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전·학·공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 문화가 되기까지가 왜 이렇게 힘들까? 주도할 사람(리더), 시간, 예산, 조금의 강제성(책임감 부여) 등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걸 다 갖추면 만들어질까? 어떤 조합이면 될까, 적은 조합으로도 잘 풀어가는 학교도 있고, 다 갖춰도 형식적인 기록만 남기는 학교도 있다. 저해 요소를 관리자, 교사, 강제성, 예산, 업무 등에서 찾기도 한다. 교육청이 내세우는 정책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거부감이란 딱지가 붙는다. 자율성과 주도성을 강조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도 참 길고, 관계도 복잡하고 방향이 중간에 틀어져 버리는 모습도 본다. 학교 구성원의 저마다 철학과 삶의 관점에 따라 속도와 진하기, 폭이 다 다르다.
전·학·공,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도 경남 교육청의 정책 가운데 하나로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목적, 목표, 방향은 다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엷어져 사라지는 듯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그 목적에 맞게 잘해 나가며 성장하는 곳(모임)도 있지만, 여전히 거부, 불편, 업무라는 관성의 벽 넘기를 주저하는 포기하는 곳도 많다. 그러질 못할 환경일 수도 있고 각자의 철학과 해석의 관점에 따라 받아들임이 다 다르다. 자의적 해석과 홀로 학습의 욕구라는 방어막으로 관성에 배척을 더하기도 한다. 하지만 벽을 넘거나 뚫으며 배움의 기쁨, 성장의 보람으로 뚜벅뚜벅 공동체와 함께 전문성을 넓혀가시는 분도 많다. 다시 그 취지와 내용, 그리고 현실을 되돌아보자. 본래 자리를 찾고 그 뜻을 살려보자. 철학과 공감, 교육 본질 회복이라는 관점을 되살려 볼 때다. 공동체가 함께 키워야 할 역량, 도전 역량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란? 미래를 향한 교육 개혁으로 수업과 평가 혁신을 위해 교사의 전문성을 키우는 협동적 연구와 실천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즉, 교원의 공동 사고를 통해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에 대한 교사의 전문성을 축적해 가는 교사 학습공동체를 말한다고 한다.
위 정의를 보면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에서는 “협동적 연구와 실천”을 ‘공동체’가 함께 한다. “교사의 전문성을 키우는” 주제로 “수업과 평가 혁신”을 이루도록 목표와 방향을 잡았다. - 협동적 연구와 실천이 되는가? - 교사의 전문성을 키우는 주제가 다가가는가? - 결국 학급 또는 학교에서 수업과 평가의 혁신이 이루어졌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가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교육청 정책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학교 안팎으로 “전문적학습공동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꾸준히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배움의 삶을 실천하는 선생님이 많으시다. 이런 문화가 널리 펴지도록 교육청 차원 정책으로 들어와서 지원과 권장이 덧붙여진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학교 현장에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한 낱말씩 붙여가며 의미를 살펴보자. ① 공동체 ② 학습공동체 ③ 전문적학습공동체 ④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 크게 네 가지로 나눠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감이 잡힐 것이다. 학교 구성원들의 철학과 해석, 관점에 따라 접근 방법과 실천이 제각각이다. 먼발치 지켜보거나 바라보기, 잠시 머물다 가기, 영혼 없는 맛보기, 겉 맛보기, 깊숙이 참여와 같이 참여하는 온도 차가 있다. 목표와 방향을 제대로 파악 못 했거나, 자의적 해석으로 형식적 시간 보내기, 일회성 행사, 모임, 문서상 기록용으로 건너뛰기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학급이나 업무일이 많아 그럴 수밖에 없는 바쁜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회피, 무시, 극복, 품기, 융합, 변형, 소화 등으로 실천 방법과 받아들임에 따라 전·학·공의 생명력이 달라진다. 교육 전문성 연수냐, 교육과정 역량 함양이냐, 학교문화 만들기냐, 공동체의 노력이냐는 학교 교육 공동체의 참여 의지와 주체성, 주도성, 자율성에 따라 학교, 학급, 개인의 문화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히스토그램 형식으로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의 성장 곡선을 만들어 보았다. 영역별로 구분해서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 ” 의 성장 곡선
① 공동체
“공동체”란 말을 모임 그 자체란 것에 중점을 둔다. 잘 모일 수 없으니 그래도 학교 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모이자는 노력이 보인다. 개별 시간 요청(요구)이 많아 최소한 학교 모임 문화를 살리자는 뜻이 담겼다. 처음부터 뜻이 맞은 사람끼리 만나면 좋겠지만, 모임 자체를 학교 교육과정 가운데 하나로 두어 조금 강제성을 둔다. 처음에는 부장(업무) 중심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교육 계획에 따라 주제 정하기 때문에 주도성, 자율성까지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공동체의 철학 공유, 필요성을 찾기 위한 초기 모음 형태다. 목표를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지 않으면 힐링, 체육, 취미 등과 같은 동아리 활동으로 한시적 소비성 모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또는 예산 나눠 먹기식, 전문성과 권위가 떨어져 형식적 관례적 모임으로만 남기도 한다. 이런 전·학·공이라면 학교 비정규직이나 공무직 구성원들이 교사에 대한 믿음과 전문성을 의심해 불신과 형평성을 내세우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으로 자라기도 한다. 형식· 관례적 모임이 결국 비전문성의 고착화, 관성화로 이어진다. 왜 모인 것인가? 어떤 전문성이 길러야 하는가? 먼저 고민해야 한다. 교사 성장을 위한 공동체의 자발성과 주도성, 공감대로 이어져야 한다.
② 학습공동체
단순 모임을 넘어 ‘학습’ 주제를 정해 의미 있게 배움(학습) 시간을 가진다. 학습 거리, 공부 거리를 정하면서 모인다. 책 읽기, 책 이야기하기 등 책을 매개로 모임을 꾸리는 형태가 많다. 학습 내용은 다양하다. 구성원들이 읽고 싶은, 알고 싶은 주제를 잡아서 의미를 꿋꿋하게 살려 나간다. 의미를 잃거나 형식만 남으면 때로는 책만 사고 끝내버리기도 한다. 학습공동체에서 공동체로 되돌아가거나 공동체(모임) 자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왜 이런 모임을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계획성 있는 주제 잡기, 모임 정례화(정기 모임), 학교 교직원 모두가 참여하는 다모임 형태로 꾸리는 학교도 많다. 폭넓게 주제를 잡아 담론 중심 이야기로 학교 구성원 공동체의 철학과 인문학적 성찰력을 높인다. 메타 학습의 효과를 본다.
전체 계획에는 시간과 장소, 역할 분담만 짜고, 내용(주제)은 구성원들이 그때그때 참여로 자율성과 주도성이 생기면 여기에 ‘전문성’이 자라 결국 ‘전문적학습공동체’로 성장한다. 대부분 학교가 ‘학습공동체’에 머물러 있다? 이 정도만이라도 괜찮은 수준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한 발 더 나가서 ‘전문성’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런 ‘학습공동체’ 참여도 잘 안 하시는 분들도 있다. 교대 졸업하고 교사 자격증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배움이 필요한지, 굳이 모여서 할 필요가 있는지, 개별 연수로 하면 안 되나, 수업에 적용,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어서라는 말이 오간다. 강제할 수 없으니 방과후 활동 등으로 바빠 늘 ‘공동체’, ‘학습공동체’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하고 학교를 옮겨 다니는 개인 설정 삶을 되풀이한다. ‘학습공동체’ 업무담당자 정도가 되면 그때 어쩔 수 없이 해야겠다는 말도 들린다. 내 일이 아니면 학교에서 별 간섭이 하지 않는다는 자기만의 철학이 자란다. 간섭과 참여는 다르다. 간섭은 업무와 관련 있다면 참여는 학교 공동체에서 길러야 할 학습 방법, 관계 형성을 위한 출발점 형태다.
교사는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배움이 필요 없는가? 자격증은 강제하는 학습이었다. 필수로 갖출 할 의무 같은 학습이 있었다. 교사가 되고 나서는 스스로 다양한 역량이 필요하다. 그건 자격증이 없다. 자율적이고 주도적으로 갖추어 스스로 만족하며 성장한다. 관계 형성과 조직, 공동체와 상호 소통을 서로 부대끼며 조절하며 배워야 할 새로운 역량, 미래 역량 가운데 하나다. 자율성과 주도성이 없으면 무개념, 무의식, 무 질문의 형식적 일회성 참여 문화가 자기 몸에 잡초처럼 자란다. 그게 관성화, 굳어지면 ‘꼰대’다.
③ 전문적학습공동체
이 지점이 고비다. 넘어야 할 고개가 높다. 처음부터 ‘전문성’에 초점을 두고 출발할 수 있지만 튼튼한 공동 철학, 공감, 내공, 구성원들의 전문성, 주도성, 주체성 등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지루고, 쉽게 지쳐 버릴 수 있다. ‘전문성학습’이란 무얼 말하는가? 교사니까 ‘수업’일 것이다. 수업에 관한 연구, 고민, 수업 공동 기획, 수업 나눔, 수업 평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토의 토론 같은 것들이 주요 대상이다. 먼저 각자의 전문성에 대한 관점과 기준을 공유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하고 막연한 주제보다 교사 전문성을 높이는 주제(수업)로 깊이 있는 담론 자리로 넓혀진다.
주체성, 주도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거나 이미 그런 삶을 사는 중간 리더가 있어서 탄탄하다. 오히려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한 교사들이 눈치 보며 마지못해 참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꾸준함이 교육의 본질을 늘 되새기게 해 교사로서 의식을 깨치게 한다. 왜 함께 모여 ‘전문적학습’을 해야 하는지 서서히 알게 된다. 시간이 좀 걸린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수업에 대한 ‘전문적학습’ 담론 등으로 토의, 토론이 달아오르면 수업 공개, 수업 실천, 수업 나눔까지 깊어진다. 이 지점이 변곡점인 것 같다. 결국 수업에 대한 변화, 공유, 나눔까지 이어져 ‘수업혁신’이 앞에 붙는다. 수업 실천, 공개, 나눔, 평가의 고개를 넘어보자
④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소멸)
“수업혁신”에 ‘혁신’이란 말이 무겁다. 큰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문적학습공동체”에서 수업 실천, 공개, 나눔, 평가의 고개를 넘는 “수업혁신”이 붙은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이다. 프로젝트 학습을 위한 계획, 기획, 공동 운영, 공동 실천으로 실천 주도성을 가진다. 이런 과정에서 교사 교육과정이 완성되고 다듬어 가며 성장한다. 이런 문화가 ‘교육과정’ 중심학교와 전문적학습공동체로 자란다. 실천 역량이 높아진다.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구성원들 철학과 실천력이 탄탄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낯은 교사라면 처음 부담감, 지속가능성 의문, 수업 공개, 수업 나눔 등으로 자기 수업을 드러내야 하는 부담도 있을 것이다.
교육철학과 공감, 필요성 공유는 꾸준히 되풀이 고민하며 학습할 부분이다. 공동체가 함께 성장해야 할 시간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런 시간이 힐링이 되기도 한다. 여기 ‘(소멸)’이라고 붙인 까닭은 이런 문화가 한 번으로 끝남이다. 주축 구성원 때 한시적으로만 하다가 구성원이 없어지면 사라진다는 말이다. 구성원들이 바뀌면서 그런 문화가 겪을 수 없거나, 정착된 문화를 새로운 사람이 적응하기에 너무 부담스럽거나, 역량 부족 등으로 기존 문화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소멸’이라 붙여 보았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⑤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유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유지’다. 사람이 바뀌어도 문화는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 학교문화로 남아야 하고, 주도 교사가 다른 학교를 가도 그런 문화가 이어지거나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학교 안뿐 아니라 밖에서도 이어졌으면 한다.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유지)"는 평생을 가꾸며 지켜 나가야 할 철학과 실천 모임이다. 교사뿐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회에서 그 본질 추구를 하며 꿋꿋하게 성장하는 공동체다.
2. 어떻게 풀어갈까?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를 공동체, 학습공동체, 전문적학습공동체,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 나눠서 살펴보았다. 학교마다 다르게 해석하거나 목적과 목표가 변화가 하면서 최종 목표가 학습공동체쯤에 머물기도 한다. 최종 목표가 꼭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라고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권유, 방향 알림 정도로 말하고 현재 어디쯤 고민, 갈등, 토의하고 있는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구성원들이 해마다 바뀐다. 관리자도 바뀐다. 사람이 변수다. 구성원들 요구, 주도 교사의 의지, 민주적 협의체의 결정 등으로 생명체처럼 자꾸 바뀌어 간다. 뒷걸음치기도, 머물기만 하기도, 너무 빨리 앞질러 가다가 혼자임을 느낌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같이 한 걸음이 중요하다. 아래 표로 지금까지 이야기를 복습 겸 정리해 보았다.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이름
실천 형태
장단점
①
공동체
‣모임, 힐링 ‣직원체육 등
-관계 형성, 휘발성, 자율성 -도덕적 해이, 나눠 먹기식? -구성원 간 형평성 논란과 비판
②
학습 공동체
‣동아리 ‣정기 모임
-참여율 향상, 취미 힐링 중심, -업무 외 나머지 시간, 형식적 참여
③
전문적 학습 공동체
‣공개수업과 수업 나눔 ‣프로젝트 학습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피드백) 일체화
-배움, 필요성 되새김. -연수 필요, 연수로만 거칠 가능성 -전문성 부족 -형식적 참여로 동아리 형태로 회귀 -강제성, 타율성, 주도성
④
수업혁신 전문적 학습 공동체 (소멸, 유지)
‣배움 중심 수업 ‣교사 교육과정 완성 ‣공동 연구와 수업 ‣학교 안팎 네트워크
-처음 부담감, 지속가능성 의문 -교육철학과 공감, 필요성 공유 없으면 형식적 참여 또는 업무로 치부 -학급 단위보다 학교 단원 교육활동 확장 또는 부담 -교사 교육과정 성장으로 ‘교육과정’ 중심 실천 역량 향상
어찌 정답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답은 아니어도 그 범위, 그 언저리에서 고민, 갈등, 협의, 토의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고민과 갈등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 ‘전문적학습공동체’의 성장의 씨앗이 될 것이다. 교사는 누구나 ‘수업’ 잘하기를 바란다. ‘수업’ 전문가이길 바란다. ‘수업’을 잘하고 싶다. ‘수업’을 보는 눈이 높았으면 한다. ‘수업’을 객관적으로 보고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럼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 그런 역량은 언제 어디서 길러질지 고민한다. 혼자 문제집 풀이식 정답 찾기는 아니다. 관계 형성, 관계 회복, 관계 소통과 같이 ‘관계’ 공부(학습)가 필요하고 ‘관계 문해력’를 높여야 한다.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는 그런 관계 문해력을 높이는 좋은 학습 형태이면서 모임, 공동체다. 수업을 왜 잘하려고 하는가? 아이들을 위해서다. 교육 본질이다. 올바른 인간을 기르기 위해서다. 교육 목표에 나오는 그런 인간상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도 배운다. 배워야 한다. 그게 속 편하다. 그게 자유스럽다. 그게 마음껏 자기만의 학급 방법으로 교육 목표에 도달한다. 교사 교육과정이다. 공동체와 함께 고민하고 함께 만들고 함께 실천하며 나눔이 빠른 길이다.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신뿐 아니라 모두의 삶 전체를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공부해 나가는 긴 여정일 수도 있다. 성장은 내가 걸은 만큼, 내가 깨친 만큼, 내가 고민한 만큼, 내가 갈등한 만큼 나아간다. 어려움, 힘듦, 까다로움, 불편함, 귀찮음이 한 걸음 내딛기를 붙잡으려 한다. 이걸 이겨내면 내공이 생기면 가볍게 한 걸음, 아니 두 걸음을, 세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 지름길은 없다. 우연히 지름길을 가더라도 압박과 힘겨움을 못 이긴 내면은 금방 드러난다. 더 높은 고개, 험난함을 이겨낼 수 없다. 내공은 많이 배운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이겨내는 체력, 지혜, 마음, 관계에 있다. 만족할 만한 결과는 단지 늦게 올 뿐이다. 그 과정을 이겨내자. 공동체와 본질 추구에 함께 실천하자. 1+1은 2가 아닌, 3, 4, 5, 10,100이 될 수 있다.
"수업혁신 전문적학습공동체"“는 교사와 공동체가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성장 코스이다. 교사 삶(생애)의 한 부분이 되어 주체성, 주도성을 성장시켜 나간다.
상수는 바뀌지 않는 수. 변수는 바뀔 수 있는 수다. 수많은 수를 변수에 넣어 일정한 규칙인 함수가 생기면 일정한 결과로 나온다. 함수의 특징이다. 우리 삶도 일정 결과가 나오는 함수 찾기 과정이 아닐까? 살면서 여러 함수가 생긴다. 다루는 수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함수가 만들어진다. 일단 함수로 정의된다면 일정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삶의 이런 함수가 몇 개쯤 있을까?
우리 삶의 역량, 능력, 실력 따위는 상수일까, 변수일까? 부와 명예 따위는 또 상수일까, 변수일까? 흔들이지 않는 꿋꿋한 과정, 공정성, 방법 따위는 함수일 것 같다. 어떤 값을 넣어도 일정하게 값이 나와야 함수로서 자격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량 함수다. 몇몇 변수로만의 만족으로는 불안하다. 다양한 수, 큰 수, 복잡한 수를 넣어도 언제나 일정 답을 나와야 한다. 어느 정도 넣을 수의 양이 필요하다. 많은 시간과 실천, 대응, 삶의 실천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수를 넣어도 일정한 결과를 얻는다면 삶의 공식으로 자리 잡는다.
젊을 때는 수많은 자기만의 함수를 찾는 시기다. 많은 수를 다루며 일정함을 증명하는 시간을 보낸다. 자기만의 함수를 증명하는 시간이다. 지루하기도 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도 많을 것이다. 얕은 믿음에 포기하기도 하고 누군가 대신 하는 꼼수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모면과 회피로 한번 넘길 수 있어도 다음번 또 다른 큰 함수는 그럴 수 없을 거다. 증명의 시간과 나날은 스스로 해야 한다. 그게 삶의 도전, 재미, 보람, 성취감일 것이다.
내가 걸은 만큼 내 인생이다. 내가 넣어본 수만큼 안전한 함수가 된다. 변수에 넣은 수의 양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부딪힘과 고난, 시행착오가 모두 변수를 증명하는 데이터다. 우리 삶은 믿음이 가는 함수 찾기 과정이다. 한 함수를 찾았다면 다음은 더 큰 함수에 도전하거나 도전받는다. 이게 현실이기도 하다. 다양한 함수를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함수를 볼 줄도 안다. 제대로 된 함수인지 공정한지 불공정한지 안다. 기준과 상식, 공정은 이렇게 자라면서 사회를 살찌운다.
자기만의 상수가 생길 때 성취감과 성장, 도전, 꿈이 튼튼하게 자리 잡는다. 불규칙한 결괏값이 나오는 함수를 가진 어른도 많다. 적은 데이터만으로도 증명되었다고 굳게 믿기도 한다. 불량 함수임을 늦게 깨쳐도 그걸 숨기거나 올바른 함수로 착각하기도 한다. 순간순간만을 넘기려 올바른 함수인 척 여기기도 한다. 당장의 자기 이익, 편안, 권력 등으로 자기만의 상수라며 자기 체면을 걸기도 한다. 불량 함수에 맞는 변수만 모으는 굴레에 갇혀 못 벗어난다. 불량 함수를 깨는 수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줄줄이 근본 구조가 흔들리며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진다. 흩어져 버린다. 사라진다. 처음부터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함수를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삶의 패턴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그 위에 탑을 쌓든, 집을 짓든, 건물을 높이 세울 수 있다.
인공지능은 초기에 엄청난 데이터양이 필요하다. 수많은 변수를 패턴화(함수화)하여 상수에 가깝게 결괏값을 만들어낸다. 사람도 삶의 패턴(함수)을 찾기 위해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 고민, 실패, 연습과 훈련이 있다. 상수와 변수, 함수의 관계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이어질지 되짚어볼 일이다. 내 상수는 있는지, 어떤 것인지? 내 변수는? 내 삶의 함수는 어떤 것인지? 삶을 되짚어보면서 성장 공부, 성장 생각을 해본다.
교육 관련 기사에 학령인구 감소, 학교 수, 학급당 인원수, 졸업생 취업률 같은 통계 정보가 많이 보인다. 이런 교육 통계는 질보다 양적인 문제로 경제적 관점의 해석이 짙다. 한때 교육부 이름이 ‘교육인적자원부’였다. 사람을 인적‘자원’개발이라 하여 돈에 사람을 맞추듯 경제에 교육 정책도 꿰맞춘 느낌이었다. 교육은 경제적 관점의 수익 사업이 아니다. 물론 그 ‘수익’을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폐기할 수는 없다. ‘사업’이 아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며 성장 과정의 학습이다. 평생 가꿀 우리 미래 생존의 문제가 아닌가?
지금 학교에서는 부모 세대가 겪어 보지 못한 다양한 고민과 갈등이 많다. 예전에는 교사가 학급 전체 지도에 중점이었다면 요즘은 수준별, 모둠별, 개별(1:1) 지도와 돌봄에 손이 많이 간다. 의사소통, 기초학습, 학습문해력 지원과 같은 학습 지도와 학습부적응, 감정조절, 또래관계, 학습 거부와 방해, 학교폭력, 방과후 돌봄과 같은 생활지도에도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양보다 질적인 문제로 오히려 사람이 더 필요하다.
학교는 ‘아는 것(지식)’을 바탕으로 제대로 올바르게(가치와 태도) ‘할 수 있게(기능)’ 배움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런 바탕으로 교육활동과 평가가 이루어진다. 아이들 성장과 발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얼마 전 ‘만 5세 조기 입학’ 문제가 있었다. 돌봄 문제, 사교육 심화, 아이들 성장과 사회성 발달을 이해하지 못한 정책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아이들이 충분히 사랑받을 시간과 환경, 관계와 정서가 익을 시간을 줄이면 안 된다. 앞으로도 많은 교육 정책이 나올 것이다.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도 있다. 배를 가르는 칼이 아니라 알을 품는 따뜻한 가슴이 교육에 더 절실하다. 가르친다고 다 배우는 게 아니다. 스스로 커갈 수 있는 호흡, 또래와 같이하는 사회성, 공동체와 함께 나아갈 속도를 몸과 마음으로 깨치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이’였던 우리 어른의 꾸준한 관심과 배움의 실천으로 경제뿐 아니라 문화 ‘선진국’이라는 진정한 황금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