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 2014.6.25.

국어[읽기], 6.타당한 근거(131-138)

주장과 근거의 연결 관계를 생각하며 읽기

 

1. 아침에 미리 읽기

아침 활동으로 미리 이 부분을 읽도록 했다. 1교시도 국어 시간이라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 질문하기

국어 시간에 세 사람씩 먼저 일으켜 세웠다. 내가 먼저 질문하고 아이들이 답하는 방식이다. 세 사람씩 일으키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고 집중시키는 방법이기도 한다. 처음에는 교과서대로 답을 한다. 칠판에 적어둔 교과서 질문은 아침 활동 시간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 고정관념입니까?”

첫 번째 질문이다. 일어선 세 아이 가운데 첫 번째 아이에게 질문을 한다. 머뭇거린다. 30초 정도 기다려도 말하지 못하자 앉히고 다음 아이에게 시켰다.

. 막힌 생각……

그래? 지금 말한 것은 책에 있는 거야? 니가 생각한 것이야?”

제가 생각한 것입니다.”

다음 아이에게도 물었다. 별 다른 말이 없어서 앉혔다. 이런 식을 세 사람씩 일으켜 세워서 하나씩 질문을 한다.

교과서는 덮어 놓은 상태다. 아침 시간에 그렇게 읽도록 했지만 제대로 읽지 않는 아이도 있다. 계속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 이어진다. 교과서에 나오는 낱말로 이야기 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냥 상식 수준으로 말하는 아이도 있다.

상식 수준으로 말한다는 것은 책을 읽지 않아도 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읽지 않는 것이다.

 

3. 본 것과 읽은 것의 차이

책을 보았다는 것과 읽었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눈을 글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읽는 것에는 사고 과정, 생각, 고민, 탐구, 궁금증, 의심, 비판 따위가 있다. 보면서 생각이 뻗거나 깊어지는 것이다. 기억도 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오늘 아침부터 읽어보도록 안내 글을 써 놓고 국어 시간에 책을 덮어 놓고 시작한 것이다. 읽어야하는 지를 또 확인하고 목표와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다. 내가 질문한 것들이 결국 글을 읽는 관점이 되기도 한다.

고정관념 이야기하면서 예를 든 것이 있었는데 무엇, 무엇이 나옵니까?”

한두 아이만 말한다.

이런 본보기 예도 다 읽고 말할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관점이나 문제와 해결 짜임으로 읽기는 앞 시간에도 많이 해왔다. 이번 주는 주장과 근거의 연결 관계를 생각하며 읽기다. 단원마다 관점이 주어진다.


3. 제대로 읽기

내가 던진 질문(교과서에 그대로 나오는 질문이다)에 답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더욱더 책을 읽어야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제 시간을 주었다.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할 테니 제대로 읽도록 했다. 훨씬 아이들이 몰입한다. 질문에 대한 알맞은 답이 어디에 숨었을까하는 마음으로 본다. 읽는다.


4. 노인과 여인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준비한 사진이다.

이 사진 설명에 앞서 이 사진을 보고 질문을 했다.

솔직히, 이 사진 보고 이상하다, 야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

두 아이만 빼고 다 손을 든다. 조용하다. 눈이 똥그래졌다.

여러분은 여자가 가슴을 내놓고 할아버지가 마치 입을 대는 있는 모습이 보니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죠?”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이어서 해주었다. 인터넷에 떠 있는 이야기 줄이면 이렇다.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한 작품이 걸려 있다. 방문객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해 한다.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에.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푸른 수의를 입은 주책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은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지고 있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은 정말 3류 포르노인가?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분명히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교도소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교도소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 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교도소를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 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 눈도 생각도 달라졌다. 보이는 모습만이 아닌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알면 달리 보인다. 감동이다. 우리는 배운다. 보이는 모습에 보이지 않는 사실을 배운다. 진실을 배운다. 그러면 더 깊이 넓게 보인다. 늘 보던 것이 달리 보인다. 새롭게 보인다.

세상은 우리가 보는 눈에 따라 새롭다. 새로운 세상은 새롭게 보는 눈, 그런 눈을 키워야 한다. 배움이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다.

Posted by 참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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