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도 학급에 선택할 수 있어야

- 가르침보다 배움 중심으로-

 

교육청에서 내려 보내는 공문 형태는 여러 가지다. 교육부 공문을 그대로 건네 결과물(국회의원 요구자료, 교육과정에 시수 확보라는 내용 등)을 내거나, 시범·우수학교 선정이나 교과에 꼭 몇 시간을 넣으라는 공문도 있다. 이런 공문들은 학교 현장에서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해야 한다. 또 교육 행사를 안내하는 정부와 각종 다른 기관과 단체들 공문도 있다. 협조나 홍보 공문은 공문 게시나 교직원, 학부모들에게 안내하거나 희망하는 사람들만 참여하도록 한다.

크게 잡아 이런 세 가지 정도다. 받아들이는 학교 처지에서 보면 모두 같은 결과물을 내어야 하는 공문으로 여기기 쉽다. 더군다나 홍보나 안내, 희망자에 따른 참여 안내 공문도 몇몇 분의 단독 판단으로 학교 단위의 의무 행사로 바뀌기도 한다.

조사해서 보고하는 공문은 담당자가 처리하겠지만 행사를 치러야하는 실적은 전체 학급에 영향을 미친다. 교과 시간을 빼앗아 버리거나 수업 흐름의 맥을 끊어놓는 잡무라는 괴물이 되어버리기 한다. 생각지도 않는 행사가 또 생겨서 괴롭힘을 받는다는 느낌이 쌓이고, 비록 행사를 치루기는 해도 불편하고 불평스러운 행사라서 빨리 끝내는 것에 목표점을 둔다. 이렇게 받아들인 행사의 교육적 효과는 오히려 역효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안전, 학교폭력, 성교육, 독도교육, 다문화, 국제 이해 교육과 같은 실적을 내어 보고하라면 캠페인, 외부인 초정 강연회, 학예 행사(글짓기, 표어, 그림 그리기)와 같은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 해오던 전시성 행사이지만 이런 방식 말고는 해본 경험이 없고,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서 왜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해서 맞춰주는 정도의 참여만 이루어진다.

권고, 안내, 선택 가능한 행사도 업무 담당자나 관리자의 참여 지시(본인은 지시가 아닌 권고 수준이라지만)에 따라 의무 행사로 바뀌기도 한다.

 

보고 공문이든 선택 가능한 행사이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학급의 교사나 아이들이 아니다. 따라야하는 행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율성을 내어볼 기회가 없다보니 책임과 내용성 있게 참여하기보다는 행사를 빨리 치른다는 것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행사와 교과 활동이 융화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움직이게 된다. 분리되어 운영하다보니 늘 교과 시간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잦은 행사로 교과 시간을 빨리 조절해야하는 촉박함을 가지기도 한다. 진도를 빨리 빼야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학급에서 보면 이런 행사가 본래 취지가 좋고 나쁨을 떠나 잡무로 느껴지기 쉽다. 수업의 흐름과 맥을 끊는 방해 요소가 된다. 행사의 본래 취지는 틀림없이 좋은 의도와 뜻, 요소가 담겼다. 그런 요소들이 시기 문제지 결국 학급에서 언젠가는 다루는 교과와 생활 지도 요소이기도 하다.

행사를 학급에서 선택해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사를 교과로 끌어들여 재구성할 기회마저 막히거나 잃는다. 참여에 뜻이 있는 교사나 학급에서는 나름의 기획과 아이디어, 참여 방법에 대한 의논과 토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교육 효과가 높다. 이른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이 학교 교육과정을 기획, 운영, 관리하는 사람에게 필요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철학적 소양을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철학적 공유를 위한 시간, 의견 나눔, 소통이 회의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소통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교사들도 배우고 성장해야한다. 소통하는 배움이 필요하다. 서로의 생각을 모으고 큰 목표를 함께 만들어 공동의 책임감으로 주체적인 삶의 노력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하겠다.

 

주어지거나 해야 하는 행사, 몇몇 사람이 결정한 행사는 비록 하기는 하겠지만 교과와 섞이지 못한다. 빨리 치르려는데 목표점을 세워 행사 본래의 목적이 옅어지고 영향력도 떨어진다. 학교의 민주성은 교직원들과 의논해서 학급(교사와 아이들)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는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율성을 살리는 씨앗이다.

 

학교 실적이 학급 수업과 교육 흐름을 끊어서는 안 된다. 행사가 교과에 함께 어울려 재구성하여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치러질 때 행사 본래 목적도 함께 산다.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학교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닌 분이 많으시다. 학교 차원에서 무엇인가 했겠지만 그게 학급에 어떤 영향 있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드러나지 않는다. 행사 치루고 무엇인가 배웠다, 재미있었다, 좋았다, 다음에 또 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몇몇 아이들에게 이끌어 낼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진실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해야 할 행사를 말고도 학교마다 교육과정에 따라 치루는 행사가 많다. 교육과정에 있어서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된다. 이런 행사들은 행사와 교과를 융합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교과로 우려낼 기회가 된다.

물론 학교 구성원들 분위기에 따라 이것 또한 지시, 의무, 동원되기도 한다. 서로 의논해서 행사가 배움의 잔치 분위기로 이끄는 학교도 있다. 두 경우 다 결국 한 행사를 치렀다는 결과는 똑같지만, 그 과정과 분위기, 아이들과 교사의 자율적인 참여, 배움과 성장, 자율성, 책임감 따위에는 틀림없이 차이가 난다. 구성원들이 안다. 행사를 소비했는가, 성장의 배움이었는지. 배움 중심이란 말에는 이런 선택 기회, 자율성, 책임감이 어우러지게 의논하고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녹아 있다. 담고 녹아내는 실천 중요하다는 것을 다 함께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외적 동기에서 벗어나 내재적 동기로 성장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내재화가 되면 문화로 살아남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스스로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관습이 된다.

 

가르침에서 배움 중심 수업을 하자는 말을 자주 한다. 학교와 교사의 소통과 회의 과정도 배움 중심이 되어야겠다. 일과 결과 중심 행사보다는 참여하여 함께 만들고 고민하는 과정 중심이어야겠다. 선택하는 사람은 책임 있게 실천한다. 기회를 주어야 주체적인 참여를 한다.

성과 중심의 유혹을 떨치고, 다른 학교와 경쟁, 학교와 교사 평가 지표를 채우려는 욕심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평가 지표는 외적 자극들이다. 외적 자극에 길들여지면 결국 그것이 없을 때는 스스로 목표점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욕심을 비우면 아이들 마음과 눈이 보인다.

Posted by 참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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