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은 공부를 즐기고 있습니까? 바로 답하기가 쉽지 않다.

창의성 교육, 스마트 교육, 인성교육과 같이 교육 앞에 많은 수식어가 붙어왔다. 시대 변화에 따른 수단을 통해 교육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의지다. 이런 교육을 받은 현재 어른들 삶은 어떨까? 초중고, 대학을 거쳐 배워왔지만, 배울수록 하나씩 잃기도 한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일기(쓰기), 중고교는 책(읽기), 대학교는 토의(말하기), 가정을 꾸리며 생각하기를 멈춘다. 쓰기, 읽기, 말하기, 생각하기는 평생 갈고 닦아야 할 행위다.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공감을 하지만 현재 자기 삶에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되새겨볼 일이다. 공부를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거나 수단으로만 삼으면 그 목적을 이루고 나서는 이런 행위가 멈춰버린다. 필요성의 유효기간을 정해버린 셈이다.

배움이 멈춰지면 생각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오래가야 한다. 오래가려면 스스로 선택(자율성), 동기(감정)가 필요하다. 선생님, 연예인이 좋아 공부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처럼 쓰기, 읽기, 말하기,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즐겨야 한다. 지식을 얻는 수단을 넘어 공부 자체에 대한 좋은 감정이 붙어야 스스로 선택하고 성장하는 기쁨이 일어난다.

즐거운 배움은 생산적이다. 단편적인 지식의 소비와 반복이 아닌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롭게 만드는 창의성이 샘솟는다. 이런 과정에 성취감이 생겨 긍정적인 마음으로 넓혀진다.

지금 어른 세대는 지식과 결과물 중심 시대에 살아서 즐거움을 찾을 기회가 적었거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 지금 세대 아이들과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배우자. 배우는 과정을 함께 즐기자. 함께 공부하고 책 읽으며 배우는 삶을 가꾸자. 함께 가꾸면 1+13되고 5가 된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교육은 멀리 가는 길이다.

경남교육 비전이 배움이 즐거운 학교·함께 가꾸는 경남교육이다. 배움을 즐겁게, 함께 가꾼다는 말을 곱씹어 보자. 좋은 가르침은 함께 배우며, 그 배움을 즐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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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끓는점, 자전거 타기, 헤엄치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끊는다. 20도에 20%, 50도에 50% 만큼 끊지는 않는다

99도까지 열을 한껏 올려서 100도가 되었을 때 끓기 시작한다.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울 때도 수십 번을 넘어지고 엎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균형을 잡아 그동안 넘어지고 엎어지며 움직였던 거리를 단숨에 앞지른다

수영을 배울 때도 물장구치고 숨을 고르며 여러 번 물을 먹다가 어느 순간 물에 뜬다. 한껏 힘이 들어간 팔다리도 부드러워지고 물살을 느끼는 여유까지 생긴다

여기서 어느 순간이란 공통 지점이 있다. 임계점이다. 과학적인 용어이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란 의미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 이루기 전에 포기할 때가 있다

소질이 없다, 나에게 맞지 않는다, 별 소용이 없다, 한다고 바뀔 게 없다는 말은 임계점을 넘지 못했거나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서 멈춰버린 상태다. 임계점이 있다는 앎도 중요하다. 그게 목표 지점이 될 수도 있다

몇 개의 임계점을 넘어서 자기 꿈에 다다르게 된다.


임계점을 알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실패와 포기란 없다. 열정과 도전만 있을 뿐이다

사람마다 속도 차이가 있겠지만 물을 끓이기 위해 99도까지 올려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한 임계점을 지나면 힘과 노력이 덜 들고 부드러워진다. 다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와 양에 도전한다.

한 순간을 넘으면 깊이와 넓이가 느껴진다. 또 다른 목표가 보인다. 의미 있는 순간이 보인다


자전거 타기와 같이 짧은 시간 도달 가능한 임계점이 있는가 하면 몇 년, 몇십 년이 걸리는 임계점도 있다

몇 단계의 임계점을 넘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또다시 도전하면서 다른 영역으로 넓혀 융합해 간다.

목표를 세우고, 도전과 열정으로 실천하자. 오래 걸린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가는 힘은 임계점을 알고 한 고개씩 넘는 재미, 즐거움에서 나온다.

지금 나는 하나의 임계점에 도달했는가, 한껏 열을 올릴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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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읽고 다 기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잊는다. 그래서 되풀이하면서 잊지 않으려고 한다.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에 따르면 학습한 내용은 하루 지나면 34%, 이틀 지나면 28%, 한 달 뒤는 21%를 기억한다고 한다. 잊지 않으려면 한 시간,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주기적인 반복이 필요하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다시 읽는 것이다. 단기 기억을 반복해서 장기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기억한 내용이 언제든지 튀어나올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식구들 전화번호와 주소는 잘 기억한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잊을 만하면 반복하면서 언제든지 튀어나오는 장기기억으로 담긴 것이다.

   여기까지는 반복적인 노력으로 억지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억지 감정은 좋지도 않지만, 습관 붙이기도 힘들다. 참고 이겨냄, 버팀이란 감정이 따른다. 기억에도 좋은 감정이 붙어야 오래 꾸준히 이어진다. 재미가 붙어야 스스로 하게 된다.

 

   첫 시작으로 대부분 보고 듣기다. 보고 듣는 방법만 반복하면 지루하다. 느껴보고 이야기해보며 직접 겪는 방법도 있다. 재미가 잘 붙는다. 보고 읽으면 단순 지식을 기억하지만 행동과 실천으로 다양한 감정과 느낌까지 기억한다. 감정을 담은 기억은 오래간다. 그것도 좋은 감정, 즐거움, 재미가 좋다.

   여기까지 다다르지 못해 책을 읽어도 그때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읽는 내용도 잊힌다. 한 번 읽고 잠시 생각하고 잊기를 반복한다. 한 번 읽고 읽었다는 기억만 남는다. ‘나도 읽어봤다고만 하지 어떤 내용과 느낌을 말 못하고 자기 생각과 삶의 변화도 없다. 그래서 더욱 독서의 필요성에 회의감도 들기도 한다.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소질이 없다며 손을 놓기까지 한다. 읽기만 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꾸준한 행동과 실천으로 삶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 삶을 가꾸어야 한다.

 

   먼저 잊을만하면 반복해보자. 한 번 읽을 책은 바로 다시 읽고, 일주일 뒤 다시 읽어보고, 한 달 뒤 다시 보고, 일 년이 지나기 전에 다시 읽어 보자. 책장에 꽂아두고 생각 날 때마다 다시 보자.

   자꾸 보면 읽는 속도와 전체 흐름 찾기도 빨라지고, 중요 핵심 부분이 쉽게 잡힌다. 한 번 읽을 때 몰랐던 부분이 이해되고, 잘못 이해 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고, 별 의미 없던 부분이 크게 보이기도 한다. 다른 관점,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반복해서 본다고 같은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앞서 본 것에 더 많은 생각과 또 다른 생각으로 뻗을 수 있다.

   같은 학년을 여러 번 담임하면 교과 내용 중심에서 점점 아이들 마음, 생활, 성장, 철학 쪽으로 뻗는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문제는 잊을만하면 지점, 반복할 시점을 놓치거나, 알면서도 귀찮아서 하지 않거나 별 필요가 없어 보여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반복과 노력 시점에 도전, 용기가 필요하다. 의무감이나 어쩔 수 없이, 시켜서 읽으면 효과도 낮고 스스로 선택할 기회에 포기하기 쉽다. 스스로 선택이 아니면 생각 없는, 시간만 채우는 하는 척하는 습관이 붙는다. 그런 시간도 공부 시간, 책 읽는 시간으로 여기며 자기만족에 머물기도 한다. 실력도 효과도 없다. 오히려 후회와 동기만 약해질 뿐이다. 물리적인 시간만 채운다고 읽는 게 아니다. 반복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꾸준히 이어갈 힘이 동기다. 학습 동기다. 책 읽기에 즐거움이란 감정이 붙어야 한다. 스스로 잡고 마음도 가야 한다. 마음의 눈, 즐거움과 재미의 눈이다. 즐거움이 자주 일어나야 행복감이 된다. 그게 빠른 길이다. 효과가 좋다.

행복한 책 읽기는 즐거운 책 읽기의 반복과 실천이다. 책 읽는 필요성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가능하다. 믿자. 실천하다. 주기적으로 읽어 가면서 첫 번째 단계인 습관이 드는 임계점을 통과하자. 스스로 꾸준히 하면서 즐거움을 자주 겪으면 행복하게 읽는다. 즐거운 경험이 성취감이 되어 또다시 실천하는 동기가 된다. 알고 깨치는 즐거움과 실천하는 재미까지 붙는다. 몸에 붙는다. 몸에 붙은 지식이 토의 토론에서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배경 지식이 된다.

 

   취업과 시험 수단, 자격증을 위한 책 읽기는 목적 달성이 되고 나면 손을 놓기 쉽다. 물론 그렇게라도 하면서 필요성과 즐거움을 느껴 습관이 되면 좋겠다. 그런데 중간에 흐지부지되거나, 목적 달성 뒤에는 덮어 버리니까 포기하고 만다. 보고 읽기에만 머물고 행동과 실천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니 행복하지 못한 책 읽기로 기억되고 만다. 그래서 반복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따라하거나, 수단으로 해본 경험은 한번 해 봤다고 하면서 넋두리만 늘어난다. 책을 봐도 별것 없다며 포기한 자기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며 살 것인가? 너도 해봤자 포기한다, 아무 소용없다, 그러니 도전하지 말고 그냥 되는대로 살라는 인생론을 펼칠 것인가? 결국, 남는 것은 스트레스와 힘듦, 귀찮음, 아무 필요성 없으니까 시간 남으면 보이는 대로 (TV, 영화, 매체)로 즐기며 살라며 자기 삶을 표준화시킬 것인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 지금까지 고생(참고 이겨내며 했던 일)했으니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넋두리만 남은 삶이 내 삶이었다고 알리거나 아이들에게 물려 줄 것인가?

 

  행복한 책 읽기는 행복이 목표이기보다 그 자체가 삶이고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읽는다면 그것 또한 또 하나의 수단이 되어 얽매이기 쉽다. 읽는 것 자체가 삶의 한 부분으로 삼자. 밥 먹듯이 똥 누듯이 숨 쉬듯이 읽자. 읽고 실천하자. 한 가지 덧붙인다면 글쓰기까지 이어졌으면 합니다. 읽고 생각한 것을 써보면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또 다른 실천 거리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일기 쓰듯이 수업 일기도 쓰자. 어른들도 쓰자. 일기는 평생 지니고 다녀야 할 습관이다. 밥 먹듯이, 똥 누듯이, 숨 쉬듯이!

 

   다섯 가지 감각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다. 정보를 기억하는 방법들이기도 하다. 보고 듣고 여기에 냄새 맡기, 맛보기, 만져보기가 함께 들어가면 오래 기억된다. 기억이 생생해진다.

머리까지 이해는 시각과 청각이라면 실천과 행동은 후각, 미각, 촉각으로 살리는 일이다. 그냥 보았다, 들었다는 것보다 보고들은 것을 만져보고 맡아보고 맛보면서 온몸으로 겪을 때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생생한 기억에 재미와 즐거움을 준다. 오감을 살려내는 노력이 그래서 필요하다. 어릴수록 오감을 살리는 활동이 많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어른들은 점점 보고 듣는 쪽으로만 쏠리게 된다. 자기가 한 경험만큼의 감각 기억을 지니게 된다. 오감을 살리는 일이 줄어들기 쉽다. 물론 열정적인 사람은 보고 듣고만 있지 않고 여전히 다양한 감각을 쓰고,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열정적이다. 도전적이다. 젊게 산다.

 

  아이들에게 책 읽기보다 즐거운 감정의 경험이 더 필요하다. 오감을 살려서 실천하는 경험도 더 필요하다. 무작정 따라 하기, 체험 위주 경험이 아닌 책을 제대로 읽으면 개념 있는 실천으로 삶을 가꾸게 된다.

감정도 배운다. 보여주고 들려주기에 냄새 맡게, 맛보게, 만져보고 느끼도록 생활 속 본보기가 필요하다. 어른들도 함께 가꾸어야 할 삶이다. 가정, 학교, 사회에서 만들어야 한다.

   책 읽기를 스스로 하고 행동하면서 즐거움을 붙이자. 행복한 책 읽기는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데 있다. 책과 한몸이 되는 삶, 때로는 책대로, 때로는 그 반대로 실천이 되기도 한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주거나 시키기보다 함께 하자. 지금까지도 즐거움을 익히지 못했다면 다시 시작하자. 늦지 않았다. 삶의 행복을 한 가지 찾아가는 즐거움도 사는 재미와 맛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함께한다. 아이와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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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다 보면 힘들 때도, 여유로울 때, 쉬어야할 때도 있다.

처음 산을 오를 때는 정상이 얼마쯤 걸릴지, 길이 익숙지 않아 발 앞만 보고 가기도 힘들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길 찾는데 온통 신경을 쓰게 된다. 이런 길도 서너 번 다니다보면 익숙해져 눈높이가 달라진다. 높고 멀리 보인다. 목표 지점(정상)에 얼마 쯤 가야 닿을 것인지 감이 잡힌다. 어느 곳이 숨 가쁜지, 쉴 곳은 어딘지, 호흡을 고를 수 있다. 호흡 조절이 가능해지면 처음 올랐을 때보다 훨씬 여유롭다. 앞만 보고 가던 길에 풀과 나무 먼 산을 볼 여유가 생긴다.

 

우리 경험과 공부, 책 읽기 따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방향을 몰라서 바로 코앞만 보기에도 바쁘다. 목표 지점과 거리, 숨 가쁘고, 언제 어디서 쉴지 몰라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피곤해지기 쉽다같은 내용을 서너 번 겪으면 자기 호흡을 깨닫고 몸에 익게 된다. 빠르기 조절과 쉴 지점이 보인다. 한 번으로 끝나버리면 곤두선 신경, 숨 가쁨과 힘듦만 남아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과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산을 한두 번으로 오르고 다시 찾지 않는 사람도 많다. 첫 경험인 힘듦과 숨 가쁨까지만 겪고 체험정도만으로 멈춰버린다. 온전한 코스를 서너 번 도전하고 겪으며 자기 호흡, 목표 지점에 대한 감을 잡으면서 느끼는 여유로움과 즐거움까지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익숙해진 산길에는 꽃과 나무, 풀벌레 소리,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숨 가쁨과 힘듦이 익고,  자기 몸으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눈과 귀가 뜨인다.

 

같은 학년을 여러 번 하는 까닭도 비슷하다.

처음 겪는 학년은 산을 처음 오르는 느낌이다. 길을 몰라서, 목표 지점과 감이 없어서 열심히 걷지만 신경도 많이 쓰이고 숨도 가쁘다. 언제 쉬어갈지도 몰라 가다 포기하거나 멈추기도 한다.두세 번 같은 학년을 하면 똑같은 교육과정이지만 깊이를 달리 느낄 수 있다. 보지 못한 것, 빠뜨린 것, 그냥 넘긴 것, 가치 있는 것들이 들어온다. 우선 학교 행사와 학급 교육과정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아이들 반응, 행동 패턴도 보인다. 언제 바쁜지, 천천히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 호흡을 알면 학급살이에 속도와 깊이를 조절할 힘과 여유가 생긴다. 그런 여유의 눈과 마음이 아이들을 더 깊이 볼 수 있는 기회다. 교육과정도 재구성하고 통합할 수 있는 눈이 트이기 시작한다.

 

산 오르기 처음 30분 정도가 가장 힘이 든다. 

길도 가파르고 숨도 가쁘다. 정상 부근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정상 부근부터는 능선을 타면 편해진다. 그때부터는 발아래 산이 시원하게 보인다. 땅만 보던 눈이 먼 산을 향하고 가까운 나무와 풀꽃도 보인다. 풀벌레 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더 멀리 더 가까이 보고 들을 수 있다. 이때부터 즐기게 된다. 한두 번의 경험만으로는 신경이 곤두 세워지고 길 찾기, 끝까지 오르기만 했던 힘듦만 남는다. 여유와 즐거움이 붙으려면 서너 번 정도의 경험, 호흡과 감을 잡을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운전하는 사람과 그냥 옆에 타고 가는 사람의 피로는 다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만 목적지를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고 가는 사람의 느낌과 상태는 다르다. 얼마 남았는지 어디를 통과하고 쉴지 운전자는 온몸으로 느끼고 조절한다. 지루할 겨를이 없다이런 차에 타고만 가는 사람은 지루해지기 쉽다.  목표지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능동적, 수동적이게 된다. 능동적인 사람은 주제척인 경험을 반복하면서 온몸이 산다. 수동적인 사람은 한두 번의 경험만을 반복하면서 쉽게 지루하고 피곤해진다. 같이 몸이 피곤해도 정신 건강은 다르다.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고, 잃는 사람이 있다. 도전하면서 깊이 넓히는 사람이 있고, 경험이 많은 듯 보이지만 하나씩 포기해가는 사람이 있다. ‘나도 한 번 해보았다고말하면서 한 번의 경험으로 평가만 하는 사람도 있다같은 경험을 여러 번 해보고 여전히 도전하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한 번을 하고 있다. ‘해 보았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다. 하고 있다는 말은 같은 행동, 경험이지만 처음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것과도 같다. 처음 읽을 때는 줄거리 중심으로 읽지만 두 번째 읽으면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사건이나 인물이 드러나게 된다. 세 번째 읽으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생각나고, 네 번째 는 자기 삶과 엮어보기도 한다. 같은 책을 여러 번을 읽으면 똑같은 내용이어도 다르게 읽힌다. 관점과 깊이와 넓이가 달라진다. 속도 조절도 가능해진다. 빠르게 넘어갈 부분, 천천히 곱씹을 부분이 보인다. 이렇게 읽으면 책 읽는 즐거움이 붙는다.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까닭은 즐거움을 몸에 붙이기 위해서다.

책 읽기, 공부하기, 학급운영(살이)도 결국 즐거움이 붙으면 오래가고 새로워 진다. 깊이와 넓이가 생기고 자기만의 전문성을 키워진다.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힘, 자기주도적인 삶으로 이어진다처음 산을 오를 때는 자기 주도가 아니라 힘들고 지루하다. 다른 사람을 따르다보니 자기 호흡과 감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것도 자꾸 하면 점점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때쯤이면 의지하지 않고 가는 길을 즐길 수 있다. 몸에 익기 때문에 익은 만큼의 여유가 생긴다. , , 코가 열리고 생각도 넓게 펼쳐진다.

 

즐거움은 힘듦이 몸에 붙어 익숙해졌을 때 주는 선물이다.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같은 행동과 경험의 반복이 결코 똑같은 결과의 반복이 아니다. 행동은 같아 보여도 그 내면에는 생각과 관점이 깊이 있게 펼쳐지고 성장한다.

 

살빼기, 자전거타기, 수영 배우기, 그림그리기……

모두가 한두 번의 경험으로 안 된다. 어려움과 힘듦, 상처가 따른다. 익숙함에 즐거움이 붙고, 자기 주도, 자기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배움이 즐겁다. 즐겁게 하는 배움이 몸에 붙으면 잊지 않는다. 잊을 수 없다.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한다. 살맛이 난다. 세상은 그렇게 살맛나게 살아야한다. 힘듦, 어려움의 뒤 즐거움을 얻자. 포기하지 않으면 꼭 온다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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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초청 공개 수업 날이었다. 수업 전 복도에서 학부모를 모아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

공개 수업에서 수업을 보십니까, 아이를 보십니까?”

솔직히 아이를 본다는 의견이 많다. 부끄러운 듯 꺼내신다물론 둘 다 본다. 교실 뒤에 앉아 지도안대로 하는지 살피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가 잘 따라하는지 신경 쓰인다. 눈이 쏠린다. 이게 보통 학부모의 수업 참여 형태였다.

따로 학부모에게 공개 수업을 보는 방법이나 기준, 관점, 취지에 대한 연수나 공부가 드물다. 그래서 공개 수업이 행사같은 느낌이다. 아이와 함께 학부모도 덩달아 평가받는 듯해서 선생님 눈치를 보기도 한다. 이런 공개 수업 날에는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 서로가 잘 해보이거나 잘 했으면 하는 기대와 긴장감이 감돈다.

 

두 번째 질문,

손들어 발표 하는 아이, 듣고 따라하는 아이, 모둠끼리 잘 어울리는 아이가운데 어떤 아이가 잘 하는 걸까요?”

우리 아이가 발표를 잘하느냐는 말이 학부모 상담 때마다 자주 나오는 걱정 가운데 하나다. 공개 수업에서 자기 아이에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아이의 무엇을 볼까?

수업 마치고나면 발표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 묻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손들어 발표를 했는지 잘 했는지에 평가 관점을 두기도 한다. 혹 내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면 괜히 교사에게 죄송한 마음도 내비친다. 아이들 마음도 비슷하다. 공개 수업을 아이나 수업, 교사, 학부모의 평가 관점으로 보는 듯하다.

 

공개 수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왜 공개 수업을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과 기회의 시간이 흔치않다보니지도안대로 그대로 진행되는지 평가하듯이 훑어볼 수밖에 없다.

학부모에게 공개 수업은 자기 아이의 학습 방법, 참여 상태와 학습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어떻게 수업에 참여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풀어 가느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학부모의 공부 시간인 셈이다.

모둠 활동에서 토의를 이끄는 아이, 나서서 발표하기를 좋아하는 아이, 주로 듣는 아이, 친구와 의논할 때 활발한 아이, 잘 듣고 기록하는 아이, 신중히 탐색하는 아이와 같이 다양한 성향이 있다. 어느 아이가 잘 한다 못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평가를 해서도 안 된다. 외향적인 아이는 말이 앞서고, 내향적인 아이는 말을 아낀다. 실수하며 배우는 아이가 있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준비시간이 긴 아이도 있다. 무슨 말인지 의미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아이, 활동에 몰입하지만 왜 하는지 모르는 아이, 안 듣는 것 같지만 이해하고 움직이는 아이, 몰라도 눈치껏 따라하는 아이도 있다.

공개 수업은 이런 아이들의 학습 성향, 습관, 방법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공개 수업은 결과 발표 위주보다는 오히려 평소 수업다워야 한다. 또한 자주 열고 자주 보러 와야 한다.

수업 뒤에 아이와 수업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학부모가 눈엔  다른 친구와 이야기 하느라 교사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때 상황을 말해보면 알아듣고 친구와 의논했을 수도 있다. 친구 이야기를 잘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말인지 몰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공개 수업에는 답 맞추기식 수업도 많다. 미리 토론, 조사한 것들 말하기인데 대부분은 틀린 답은 없다. 답을 확인하는 방식인데 이미 아는 답, 준비된 답을 드러내는데 신경을 쓰게 된다. 목소리나 발표 방법, 보이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작 아이들이 배우는 과정은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이 배우는 과정을 보려면 모르는 것이 나와야 한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애매모호한 상황이나 개념이 나와서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과정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 과정을 어떻게 해결하고 누구 도움을 받으며, 어떤 관계를 맺으면 푸는지 살펴봐야 도움을 줄 수 있다.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아이나 학부모가 모두 이런 상황을 당황스럽거나 익숙하지 못해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드러나지 않다면 일부러라도 나오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 상황을 미리 학부모에게 일러두고 잘 관찰해게 하면 재미도 있다. 아이들이 하나의 개념을 알기까지 거쳐야하는 고민의 과정이 보인다. 토의를 이끄는 아이, 무작정 자기 답이 맞다고 우기는 아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듣기만 하는 아이, 사전을 찾아서 조사해보려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탓할 상황이 아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았다가 가정이나 학급에서 도움을 줘야한다. 독서력, 평소 대화나 상식이 모자랄 수 있다. 문제 상황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는 문해력이 낮을 수도 있다. 친구 눈치 보거나 충분이 알아도 말 못할 수도 있다. 자존심 때문에 뚜렷하지 않는 의견을 우기기도 한다.

 

문제 해결 상황이 아이나 학부모에게 긴장시킬 수 있지만 드러내서 공유해야한다. 부끄럼, 눈치, 잘 보이려는 마음이 오히려 배움을 방해할 수 있다.

학교에 모르는 것을 배우러 온다. 수업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교사가 던져 놓고 외우기만 하는 그런 방식은 이제 지금의 학부모 세대에 끝을 맺어야 한다. 머리를 맞대어서 풀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 결과가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풀어내는 과정에서 서로의 협력과 관계, 동의, 양보도 함께 익힌다. 사회적 활동과 관계를 통해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도전과 용기가 생기도록 하는 역할도 배움의 중요한 요소다.

 

수업에서 지식 자체를 얻기도 하지만 지식 습득 방식도 익힌다. 수업을 본다는 것은 모르거나 애매한 또는 새로운 지식을 어떻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 오류가 따른다. 이런 과정이 나와야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꾸중의 대상이 되면 학습에 대한 동기와 도전이 꺾이고 공부의 즐거움이 사라진다. 공부를 참고 이겨내는 대상으로 여겨  언제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는 손을 내려놓고 만다.

수업에서는 아이들마다 당연히 잘하고 못하는 차이가 드러난다. 수준이 높고 낮은 아이도 있다. 수업 내용에 따라 차이가 높기도 낮기도 한다. 다른 애보다 더 많이 알아서 빨리 답해서 생각하지 않은 발표도 될 수 있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틀려도 좋다. 오히려 틀리는 편이 좋다. ‘틀렸다는 것에 주눅이 들고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면 맞는 답만 보이려는데 신경 쓰이게 되어 질문이 사라지기도 한다.

틀리면 과정을 밟아가면 된다. 맞은 답이라도 과정 속에 애매한 부분을 드러내어 따져보면서 원리를 튼튼히 해야한다. 틀린 애들이 왜 틀렸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서로가 배우고 깊이와 넓어지는 맛을 찾아는 기쁨, 배우는 기쁨일 것이다.


공개 수업의 의미가 무엇인가,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한번 되짚어보자. 공개 수업에 참여하기 앞서 학부모들과 함께 공부할 시간에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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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조사 학습이나 보고서 과제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시키면 컴퓨터 글자판의 Ctrl+CCtrl+V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 무엇을 찾으려면 이제는 거의 인터넷 검색하는 방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우리말과 외래어, 환경 문제, 토론 문제 따위를 찾을 때도 가장 먼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사전이나 신문, 백과사전도 이제 인터넷 안에 다 들어가 있다. 교과에 나오는 여러 가지 조사와 보고서 활동은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모으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 아이들은 손쉽게 필요한 정보를 복사하기와 붙이기 기능을 활용하여 눈으로 훑어 보며 끌어 모은다. 모으기 쉽게 되어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런 수준의 방법까지에만 머문다. 대부분 조사와 탐구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가 복사해서 붙여서 정리하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 정도라도 해오면 다행일 때도 많을 것이다. 모은 자료가 많다 싶으면 간추려 줄이거나 글꼴을 줄여서 채우는 편집 기술을 부리기도 한다.


 제대로 참고하는 일이 없다. 참고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참고한다는 의미가 뭘까? 정보 찾기가 답을 찾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보니 끌어 모은 자료의  글꼴, 색깔, 그림으로 꾸미는데 더 신경을 들이기도 한다. 겉꾸밈에 시간과 노력이 낭비가 된다. 이런 노력이 낭비라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로 보인다. 프레젠테이션 할 때도 애니메이션 기능과 효과음을 잔뜩 넣어서 기교를 부리는데 정성을 들이는 모습도 본다.

내용을 소화하지 않고 주워모아 보여주기만 하니 질문이 없을뿐더러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도 드물다


조사한 내용이나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할 때에 주로 보고 읽는다. 발표가 아닌 보고 읽기 되어 버린다. 답 맞히기 식 읽기는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도 못한다. 발표는 상대를 이해시키거나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하지 않고 보고 읽기를 고칠 기회를 갖지 못하면 보고 읽기가 발표로 여기면 졸업하게 된다. 잠재된 과정관념으로 굳어진다. 


참고하려면 우선 자기 생각과 주장, 경험 따위가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 주장, 경험을 뒷받침할 근거나 자료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논리로 발전한다. 조사한 자료가 그 논리의 한 부분이 될 때 읽기가 아닌 말하기가 된다. 말한 것에 따른 근거, 증명 자료도 보인다. 짧게 읽어줄 수도 있다. 그런 말과 읽기는 듣는 사람도 집중하고 호기심과 관심도 생긴다.

 

답 맞추기식 문제 풀이의 습관과 폐해가 이런 활동에서도 드러난다조사, 보고서 만들기, 프레젠테이션은 한 학기에 한두 정도는 할 것이다. 발표가 보고 읽기, 답 말하듯 읽기을 고치지 못하면 제대로 참고한 경험이 적어 복사해서 붙여 간추리기를 발표 방법으로 착각하여 학습이 되버립니다.


제대로 조사해보면 분류, 요약, 종합, 분석의 과정이 일어난다. 고급사고다. 그래야 발표 거리가 생기고 자기 삶과 경험이 중심이 되어서 머릿속에 담긴 의견을 말한다. 말하기, 발표다. 스스로 만든 정보이고 말하면서 살을 붙이거나 속도 조절도 가능하다. 이런 상태는 외운 정보와 구분된다. 외운 것은 말하기보다 읽기가 되기 쉽다. 남의 지식이니까 순간 기억에 담았다가 끄집어낸다. 단답식 답하듯이 읽는다. 그 뒤 쉽게 잊는다. 정보 주체가 자기냐 남이냐에 따라 생각하며 말하기가 되거나 보고 읽기가 된다.

 Ctrl+CCtrl+V가 편리하지만 우리 기억 까지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읽은 그대로 기억되지 않는다. 곱씹어야 한다. 자기 경험과 생각에 의견을 보태어 비판, 종합, 분석하면서 의미와 가치를 붙여야 한다. 복사한 것에 의미 있는 생각, 행동, 감정이 덧붙으면 쉽게 오래 기억되고 다시 살아난다.

 

참고냐, 간추리기냐?

보고 읽기냐, 생각하며 말하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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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각종 대회 종류

1. 폭력 예방, 다문화 캠페인, 흡연 교육, 독도교육, 경제교육, 


2.그림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저학년 그림 그리기, 상상화다

요즘은 글쓰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글짓기 형태에 머물고 있다. 글쓰기는 이름만 그렇게 바꾸었을 뿐이다.

포스터이다.


이런 활동으로 아이들이 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적 내기 좋은 활동과 자료.

이런 활동을 했으니 예방된다는 관념은 언제부터 였을까?

어른들의 착각, 보여주기 위한 교육, 했다고 한 것 처럼 '척'하는 교육.

이런 활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잃게 만들까?

얻는 게 말을까, 잃는게 많을까?

얻는게 많았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오히려 잃는게 많은 시대가 아닐까?

지금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부는 세대가 받았던 방식은 그대로 되물림을 주려고 하는게 아닐까.

현재의 재미보다는 미래를 준비와 참을성을 더 강조하고 


문제점, 어른들의 시킴으로 해내기는 해도 나중에 스스로 하지 않는다. 재미와 필요성을 스스로 찾을 기회와 경험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재적 동기가 아닌 외적 동기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런 결과물이 나오니까 내면화되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어른들과 아이들이나 이렇게 늘 하고 왔으니 고착화되어 간다. 잠재적 학습이 


그림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아이들이 선택해서 하기보다는 대회용, 실적용 과제로 내어야하는 자극이기에 스스로의 자극으로 불러일으키는 동기로 자라지 못한다.

자기주도, 지속가능한 학습의 경험이 아닌 벗어나고 싶은, 스스로는 하고 싶지 않는 방법으로 마음 속에 담기게 된다. 

이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호가 많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질려 버린 것들이 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일기쓰기(글쓰기)를 포기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읽기(책)를 포기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사회인, 직장인이 되면서 말하기를 포기한다. 쓰기를 배웠어도 쓰기를 포기고, 읽기를 배웠어도 읽기를 포기하고, 말하기를 배웠어도 말하기를 포기한다. 

포기하는 교육이 아니었나.

결국 길들여진 교육에 남은 것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삶이 오히려 편안함의 족쇄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 편하고, 생각없이 마구 먹고, 쓰고 노는 것이 편안 것이 된다. 스스로의 생각 시간이 어색하고 불안하고 무엇을 해야할 지 부적응이 되어서 오히려 조용함이 불안감을 준다. 자신을 돌보는 시간의 부적응,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귀찮음, 혼란스러움의 속에 자신을 숨어버리는 것, 술이나 담배, 수다 속에 자신의 잊혀지게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라고 여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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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나온 것인가, 넓힌 것인가

 

장학사로 나온지 석달이 지나간다.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지낸 삶과 교육행정하는 자리는 다르다. 차이가 난다. 

현장에 있으면서 내려오는 공문과 지시 사항에 늘 불만과 답답함을 토해내었다.  '교육행정'을 바라본 눈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교육 행정의 자리와 기관에 있어보니 여러가지 차이점과 희망도 함께 보인다.

 

아이들이 공부하면서 수업 준비, 아이들과 소통, 동학년 선생님, 학부모, 교사 공부 모임과 같은 사람과 관계가 학교 현장에서 중요했다. 교육행정은 '행정'에 초점이 짙다. 그래서 행정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 민원 대응에 민감하다. 학교 현장이나 도민들 의견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일이 많다. 관계 회복이나 관계 맺기와 같은 소통의 과정보다는 문제를 풀어야 할, 풀어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로 힘든 나날을 겪고 있다. 그래서 외로워진다. 하루 내내 컴퓨터 모니터랑 글자판으로 글을 주고 받는다. 아무런 문제 없는 일 처리가 목표점이 되어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담당 업무에 따라 생활 리듬도 차이가 난다. 정확하고 빠른 업무리 처리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장학사이런 업무와 소통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과 노력이 들여야할 '장학'이란 일도 있다. 행정 업무는 정해져 내려오지만 장학은 어찌보면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할 일이기도 하다.

장학, '학교교육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교육작용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지도·조언하는 전문적인 기술봉사'라고 사전적 의미가 있다. 지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져 그 본래 목적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고민이다.

 

'나눔'과 '본보기'란 말로 풀어가고 싶다.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리(교실)에서 나왔지만, 내 마음에는 늘 현장이 다 교실이다. 수업을 이제 그만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교실은 더 넓어진 개념으로 다시 정의를 내린다. 나와 한해 동안 같이 할 아이는 없지만, 내가 찾아가야 할 아이와 선생님, 모임이 더 많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내 마음도 편하다.

 

22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경험과 기운, 느낌은 아직까지 그대로 살아있다. '교육행정'은 배우며 익혀 나가고, '장학'은 수업과 모임 나눔으로 만들어가야겠다.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시간이 걸린다. '장학사'라는 고정된 관념과 이미지를 희석시키거나 유연하게 하려면 꾸준히 반복된 모범과 변화가 이어져야겠다. 학급에서 '수업'이 아이들에게 즐거움과 자기 꿈을 찾는 일이라면 학급을 벗어난 '수업'에는 여럿이 함께 문화를 가꾸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겠지.

 

어느 자리와 직책에 있던 '수업'한다는 마음을 지켜나가고 싶다. 

교사는 수업으로 성장한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눈빛, 마음, 웃음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이어간다. 내 학급, 우리 학년, 우리 학교, 우리 교육이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러면서 여럿이 행복해지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나 개인이 앞서가는, 빨리 갈 수 있는 속도와 기회를 지녀도 여럿 사람이 함께 한 걸음을 딛는 어울림과 맞춤이 필요하겠다.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밀기보다는 반 걸음 앞에서 방향을 일러주고, 같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를 지키는 노력도 중요하겠다.


교실이 넓어졌다. 성장하는 만큼 우리 세상도 넓어진다. 

만남은 늘 새롭다. 같은 사람과 같은 자리에 만나더라도 새롭다. 

배움은 성장이다. 배울 수록 세상은 좁아지기보다 더 넓어진다 

새로움은 벌써 내 안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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