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의 원리를 말하기 앞서 먼저 수업하면서 부대끼는 문제점이 먼저 생긴다.

부익부 현상, 무임승객 효과, 봉효과다.

셋 다 모둠 활동하면서 겪는 문제다. 

모둠 활동이 잘 이루어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모둠활동도 자꾸 하면서 훈련이 되어야 한다. 

고민과 갈등, 보이지 않는 다툼과 눈치, 협상의 협의, 양보와 기다림의 시간 필요하다.


학습진도 때문에 다음 학습을 위해 이런 관계 형성을 이룰 시간과 기회를 평생 놓칠 수 있다.

아이들 학습 훈련은 단순히 교사의 지시에 따른 행동의 고정화가 아니다.

아이들 스스로 각자 성격과 성향, 생각의 차이를 몸으로 부대끼면서 타협을 해 가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가슴 아픔과 고민, 답답함, 불합리성, 비경제성 따위도 함께 느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주적인 합의 과정을 몸과 마음으로 익히게 된다.


학습을 하는 까닭, 공부하는 까닭이 단지 몇 가지 사실을 머리(인지)에서만 안다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익게 하는 그 과정이 진정한 학습이 아닌가.

그러려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가 필요하다.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을 공유를 넘어 마음, 의견,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절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옮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아닌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학습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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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부를 하는가?"

교과 학습에 들어가기 앞서 아이들과 가장 먼저 나누는 이야기다. 이 질문은 내 수업의 첫 질문이기도 하지만 잊을 만하면 자주 되새기며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6학년이 되도록 이런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본 경험이나 시간이 드물다. 

실제 다 큰 어른다고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성장 곡선이 있다. 

A형B형이 있다. 우리의 성장을 어떻게 성장은 어떻게 진행될까?

A형은 곡선형으로 몸의 성장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올라가는 것이고,

B형은 계단식으로 어느 임계점에서 덤성덤성 성장하는 유형이다. 

우리의 몸 성장을 A형에 가깝고, 정신은 B형에 가까운 것 하다. 물론 정신 성장이 너무 느리거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다. 일반적인 평균을 잡아서 통계적으로 유형으로 A형태를 잡는다면 B형태는 개인별로 성장형태가 될 것이다.

A형 선에 B형 선에 넘치는 붉은 부분을 돋보이거니 앞서 보이는 부분이 되고, 아래쪽 연두색 부분은 뒤쳐져 보이는 부분이 되겠다. 이런 부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성장한다. 

그런데 그 성장이 아이만의 일일까? 어른은 멈추고 있는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가? 고민해볼 문제다

아이와 어른은 1:1 대응으로 성장한다.

어른의 성장을 보면서 아이도 큰게 성장하고 한다. 한 계단, 한 임계점을 오르는 경험을 함께 한다. 그래서 교육에서 성장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첫 일기를 쓸 때 던져 주는 주제는 역시 '공부하는 까닭'이다.

내가 왜 공부하는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는지를 솔직하게 써보는 일이다.

이 글에서 아이들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보고 들으며 사는 지를 살피면서 아이들 눈높이를 살필 수 있다.



많은 아이가 공부를 왜 하는지, 그 까닭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거나 정하지 않아서 버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방법은 무조건 외우기, 시간 채우기, 버티기를 하면서 공부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자꾸 떨어지고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벗어나려는 욕구만 쌓이고 있다.


어른들한테 자주 들었던 이야기와 말이 자기 삶의 방향이 되기도 한다. 그게 스스로 정한 삶의 방향인지, 자주 듣다보니 그렇게 살아야하는다고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숙명으로 여기는지 고민해볼 문제다.



공부를열심히 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자기 삶이 아닌 어른들 삶, 주어진 사람에 맞춰서 이겨내는 마음이라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스스로 선택한 경험이나 주체가 된 삶을 살지 못해서 겪는 어려움이 커가면서 나타날 것이다. 그럴 떄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해서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의 시간을 우리 교실에서 자주 가져서 함께 풀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공부를 즐기는 아이도 있다. 공부가 재미있는 아이가 있다. 재미를 찾아가는 아이가 있다. 교사가 가르치지 않아도 가정에서 그렇게 자란 아이도 있고, 교사와 만나서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자라는 아이가 있다. 그런 아이의 성장을 보는 어른(교사)도 함께 성장한다.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 가르치는 보람은 여기에서 자주 많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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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준비로 아이들에게 챙겨줄 물건이나 규칙들이 있다.

수업이 시작되면 챙겨둔 물건(학용품)을 수업 내용에 따라 활용해야 한다. 

아이들 맞이를 위한 준비까지 하고 나면 다음은 학습도구나 학습방법을 익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공책을 제대로 지도하려고 몇 년을 고민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보다 

칠판에 쓴 글이 그대로 담기기 때문에 칠판 쓰기를 제대로 하면 아이들이 감을 잡니다. 


가장 크고 넓고, 자주, 함께 쓰이는 학습도구가 '칠판'이다.  


"아이들이 공책을 준비한다면, 

교사에게는 칠판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큰 공책인셈이다."



" 숫자 카드 형식으로 네모숫자와 원 숫자를 넉넉하게 만들어 둔다. 

네모숫자는 단원에서 공부할 순서이다. 

보통 교과서 물음이어서 5번 까지 넘어가지 않는다.

원숫자는 아이들과 함께 정리해야 하니까 6번 정도까지 나오는데,

최대 8번 까지도 나가기도 해서

8번까지 만들어 둔다.

글머리 기호표는 동그라미 자석으로 그대로 활용하면 편리하다."


"칠판에 쓴 글을 대한 평가나,
활동 지시 내용도 만들어두면 편리하다. 

모둠 발표, 읽기, 공책에 쓰기, 경청하기, 시간 제한,
중요도 따위를 나타낼 수 있다"


[번호표]공부할문제_단원_네모1234원12345.hwp



"아이들 사진을 찍어서 뒤쪽에 자석을 붙여주면
아이들 발표 때 칠판에 붙여서 미리 예고할 수 있다. 

한 번 붙인 사진을 다른 쪽으로 옮겨두고, 

다 한 번씩 하면 또다른 쪽으로 옮겨 붙여서
골고루 발표 기회가 되게 한다."


 "교과서 내용을 간추리거나,
궁금한 점을 쓸 수 있게 해서 한눈에 보게 하면
아이들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서로 알아가면서 공부한다.
"


"아이들이 답하기 힘든 문제에는 자음이나, 첫 글자를 써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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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잊히는 것 같아서 잊지 않으려고발버둥 치는 마음으로 여섯 가지 떠오른 낱말을 잡아 보았다.

내 학급에서, 내 수업에서 내 학급살이에서 잊을 수 없는 낱말들

늘 해왔던 것, 꾸준히 잊지 않고 만든 것, 지금도 그 흔적과 그 자료, 그 기억이 고스란히 남은 것
학급에 있을 때는 일기로 썼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정리해 본다.

지금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이런게 아니다.
언제든지 그 자리로 돌아가면 그대로 할 것이다.
그 방법과 방식은 달라도 근본 철학과 신념은 그대로다.

교육 본질은  교육 방법과 기술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본질'인 것이다.

큰 방향을 잡고 꿋꿋이 가면 방법과 기술은 붙는다. 방법과 기술보다  큰 방향 잡기, 교육의 철학적 공유, 신념이 중요한 까닭이다.

내가 해온 것이다. 지나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때 그 방식이 아니라도 내가 아니어도 여전히 있어야 하고 꾸준히 이어가야 할 문화로  만들어야 할 우리 시대적 의무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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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공개 수업에서 무엇 니까?

 

4월이면 한창 교육과정 설명회와 함께 학부모 공개 수업이 있다.

아이가 입학했거나 새 학년 올라서 담임 선생님이 누구신지, 우리 아이 반도 보고, 어떻게 공부하는지도 볼 기회다.

공개 수업이 한 해 몇 번 있지만, 첫 수업에 한 번 얼굴 내미는 것이 끝이 되는 학부모도 많으시다. 그래서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한 해 한 번, 여섯 번으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생활, 공부를 짐작할 수 있는 짧은 경험을 담는다.

 

 

학부모 공개 수업에 오신 학부모들에게 물었다.

학부모 공개 수업에서 무엇을 봅니까?”

선뜻 내 아이를 본다고는 바로 꺼내지 못한다.

 

아이를 본다? 수업을 본다? 손을 한 번 들어보세요.”

마치 수업에 답해야 정답일 것 같은 분위기라 아이에 슬그머니 손이 오른다.

 

솔직하게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아이쪽이 대부분이다.

그래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아이를 보라는 말입니다. 당당하게 말입니다

왜 아이를 봐야 하는지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설명한다.

 

그다음 이어지는 질문 하나 더

그럼, 지금까지 공개수업 보는 법을 교육받은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없다. 이런 질문 자체를 받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공개 수업한다고 학교에서 안내장을 받았지만, 학교에 가면 전체가 모이는 강당을 들렀다가 반으로 간다. 시간을 보고 전체 모임을 가지 않고 그냥 바로 교실로 오시는 분도 많다.

교실로 가면 등록부에 사인하고, 수업 지도안을 한 부 들고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서 앉거나 서서 수업을 보게 된다. 여기까지 교실까지 들어가는 장면이다.

교실 칠판에는 오늘 배울 내용의 목표, 학습 목표가 쓰여 있다.

종이 울리면서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 내용이 첫 단원이면 배울 내용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탐구) 과제를 주고, 단원 마무리 차시라면 발표 형식의 수업이 펼쳐질 것이다. 탐색, 조사이거나 토론, 토의 과정이나, 학습 결과 발표 형태와 같이 갖가지 형태(수업모형)로 펼쳐진다. 모든 아이가 발표가 돋보이는 학습결과 발표 행태 수업은 저학년에 자주 본다. 고학년은 탐색, 조사, 토론, 토의, 협업하는 모둠 활동 따위가 많이 보인다. 여러 가지 수업 형태가 있다.


 

공개 수업을 보는 기준과 관점이다. 어떤 기준과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공개 수업 보는 법을 교육받은 적이 있는가?

수업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묻지도 따져보지도 않고 그냥 느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단지 막연하게 우리 아이가 수업 잘 받는 가에는 눈길이 꽂혔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또 하나 질문!

아이들의 어떤 행동이 수업을 잘 받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부분 1번에 답을 많이 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이제 지금까지 세 가지 질문을 내 나름의 결론을 내어본다.

 

1. 학부모 공개 수업에서 무엇을 봅니까?

2. 공개 수업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두 질문은 묶어서 말해보면 아이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수업을 보는 것은 주로 교사들이다. 물론 요즘은 교사들도 교사끼리 공개 수업에서 아이를 초점을 두고 본다. 수업내용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가르치는가는 공부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아는 정도면 된다. 그것에 대해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생각하는가에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 질문에 아이들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교사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아이가 수업을 잘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모를 때 행동이 중요하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가 있고, 왜 그러냐고 따져 묻는 아이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 번째 질문에 따른 답이 이어진다.

 

3. 아이들이 수업을 잘 받는다고 여기는 행동은?


발표와 질문을 하느냐에 기준을 잡았는데 이런 질문 자체가 틀렸다.

아이들은 발표와 질문을 하든 하지 않든 모두 공부하는 행동이다. 수업에 적응하는 성향, 형태이다. 교사 질문에 안다고 바로 발표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틀릴까 봐 눈치 보며 탐색하는 아이도 있다. 답 못해서 묻는 아이가 있고, 몰라서 듣고만 있는 아이가 있다. 모두가 배움의 상태다. 성격, 성향일 수도 있다.

그래서 교사들은 쉽게 답을 빨리 말하지 않는다. 발표한 아이나 틀린 아이에게도 생각해 볼 시간을 준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의심하고, 확신하고, 근거를 찾고, 협의하고 토의하면서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한다.

 

수업의 목적은 단순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수업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데 있다. 답을 말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다. 왜 그런지, 그 답이 나온 까닭을 설명하지 못하면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

제대로알게 하는 과정이 수업이다. 그 과정에 시행착오가 있고 그런 모습이 공개수업에서 드러나면 좋다. 어떤 상황일 때 아이들이 모르고,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이때 아이들은 실수하고 고민한다. 모르는 것에 대한 대처하는지를 살피는 일이 우리 어른들(교사와 학부모)의 몫이다.

답하지 않았거나 못 했다고 꾸중할 일이 아니다.

알아도 다시 묻고 따져보고 서로 가르치고,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한다. 그런 배움을 즐기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공개 수업은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을 성향, 성격, 행동을 알아가는 배움의 기회이면서 시간이다. 우리 아이가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참여하는지 살필 기회이다.

공개 수업은 잘했다고 못 했다는 관점이 아닌 다양한 학습 상황에서 가정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찾는 자리다. 아이와 함께 어른도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자리다.

 

  아이마다 속도와 박자가 있다.

 

발표를 즐기는 아이가 있으면 가만히 듣기를 즐기는 아이도 있다. 말이 앞서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발이 먼저 나서는 아이도 있다. 빠른 아이도 있고 늦은 아이도 있다. 아이들 공부 방법이 다 다르다. 아이들의 학습 방법과 성향, 속도를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 속도의 표준은 없다. 빠르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느리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자기 속도가 있다. 그 속도를 알아 스스로 성장시키는 역할이 중요하겠다.

또한, 박자도 다르다. 자기가 살아온 삶이 다 달라서 서로 바른 박자로 어울려 간다. 우리 아이들을 다 다른 속도, 박자, 형태로 살아간다. 어느 특정 속도와 박자, 형태를 기준으로 잡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똑같은 속도, 똑같은 박자, 똑같은 형태로 살기를 요구하거나 그렇게 살아온 어른들이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해서 아이들 성장을 변형시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개수업에서 우리 아이들의 배우는 박자를 읽을 수 있겠는가?

자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개 수업을 더 자주 열어야 한다.

 

  한 나무에 붙은 잎도 단풍과 낙엽 지는 시기가 다르다.

 

한 나무에 붙은 나뭇잎들이 단풍 진하기와 낙엽 질 시기도 다 다르다. 우리 삶도 사람마다 차이 나듯이 아이들의 배움 과정도 마찬가지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찾아야 한다. 학부모 공개 수업이 아이들의 틀림으로 본다면 꾸중과 나무람이 뒤따르고, ‘다름으로 여긴다면 격려와 도움의 손길이 붙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나무다. 큰 나무다. 해마다 커가는 속도가 다르지만, 결국은 모두가 다양하게 자라 우리 사회 푸른 숲을 이루게 할 것이다.

 



 


땀샘 최진수의 초등학급운영/맘에 드림

6장 학부모와의 만남, 관계, 소통

2. 학부모가 공개 수업 보는 법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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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

 

얼마 전 우리 교육청에서 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 연수가 있었다.

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란 교사가 재구성한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배움 중심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 학생 중심 수업과 과정 중심 평가로 학생의 전인적인 성장을 돕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한, 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가 강조되는 까닭으로 수업과 평가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기존의 가르침 중심 수업, 결과 중심 평가에서 배움 중심 수업, 과정 중심 평가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등교육과에서 하는 연수로 올해 첫 연수라 그 의미와 필요성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먼저 일체화한다는 말에는 그동안 분절화되었다는 전제가 깔렸다.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가 따로따로 노닐고 있었다는 말이다.

교육과정은 국가가 정한 매뉴얼이 있는 셈이고 이 교육과정을 각 지역과 학생들 특성에 맞춰 교사가 수업에 적용해 평가한다는 말이다.

교육과정대로 만들어진 교과서를 보고 가르쳐서 일제 고사 방식 평가를 지금까지 이어왔다. 이런 과정은 이미 만들어진 각본(교육과정)대로 학생들이 잘 알아듣기 쉽게 여러 가지 가르치는 기술과 방법으로 실행(수업)하고 가르친 내용을 객관화된 시험으로 평가해왔다는 것이다. 이게 가르침 중심이다. 배우려는 학생들 의지나 동기, 호기심보다는 이 정도 배워야 미래 사회를 위한 준비가 되기 때문에 교육 전문가들이 모여서 최소한의 규정(교육과정)으로 만들어 두었다. 교사들은 그 규정 목표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까에 많은 연구와 노력, 실천 즉 수업이다. 이때 아이들에게 단순 지식 내용이 많이 전달되었다. 이런 것을 평가했었다.

단순 지식일수록 객관화되기 쉽고 일제 고사, 지필고사, 총괄평가 형식의 시험으로 치러졌다. 그런 시험이 산업 사회 시대 때 사람을 뽑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단순 지식의 양에 따라 공부해온 사람들 세대가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심에 있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는 배우려는 사람의 뜻과 의지, 참여가 힘들다. 창의적이거나 다른 생각과 방법, 새로운 도전은 힘들다. 오히려 방해되고 시간이 더 걸리거나 필요 없는 시행착오라 여기기까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기 보다는 누구나 똑같아 지는 문제가 생긴다.

창의적인 생각, 다른 생각과 방법, 도전 따위가 오히려 요즘 시대에서 더 필요하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가치와 철학이다. 현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거꾸로 교육이 가르침보다는 배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북돋우려는 노력과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벌써 몇 년 째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교육과정-수업-평가의 일체화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처음부터 교육과정-수업-평가가 일체화가 되지 않았을까?

단순 지식의 생산과 시험의 일체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 효용, 효율성, 경제성이 떨어졌다. 가르친 것들이 실제 생활에 잘 쓰이지 않고 단순 일회성, 휘발성 지식으로만 머물렀다. 시험을 위한 시험, 지식으로만 남아버렸다.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 넣었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배우면 배울수록 학습 동기와 의지, 도전, 의욕이 떨어져 나중에는 배움을 벗어나려는 목표까지 생기게 한다. 꾸준한 배움 상태가 되지 못하고 참고 이겨내고 버티는 배움, 잠시 머물다 벗어던지는 학습 상태의 경험만 남는다.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하고, 공장의 기계 부품과 같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로 남기도 한다.

 

보통 교육과정에 맞춘 월간·주간 계획을 짜지만, 실제 수업을 할 때는 각종 행사나 계절, 아이들 특성과 학급 성향에 따라 다른 내용과 방법으로 학습이 이루어지기 쉽다. 또한 평가(시험)에 따라서 수업 내용과 방법이 바뀌기까지 한다. 가르치고 배운 대로 평가가 아닌 평가지에 나올 만한 것들을 골라 학습하는 형태로 수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한 효율성에 중심을 두는 수업이다. 시험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이다. 이런 배움은 시험이 없어지거나 시험을 끝나면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기말고사 치고 나서 학급활동이나 교과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디에 중심을 둬야 하는가?

평가에 중심을 두고 수업을 바꾸고, 교육과정까지 변형시켜 온 지금까지는 가르침 중심, 단순 지식 암기식 수업은 이제 그 생명이 끝이다.

교육과정까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지 않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러면 공동체의 합의 과정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꾸준히 문제점을 내세우는 노력은 하고 먼저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수업, 그 수업을 학생 중심으로 하고 과정 중심 평가도 필요하다.

비슷한 교과 내용을 묶거나 엮어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지만, 이것도 교사 주도가 여전히 많다. 가르침 중심의 습관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아이들이 참여와 뜻, 동기가 찾아 아이들이 참여하는 학생 중심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런 재구성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꼴로 했으면 한다. 이런 학생 중심 교육과정은 학생이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를 담기기 때문에 배움 중심 수업이 된다. 그래서 단순 지식이 아닌 그 과정을 평가한다. 평가 방법도 협의, 의논, 토론, 프로젝트, 보고서, 실행, 발표와 같은 수시로 다양한 방법의 평가가 이루어진다. 실제 배운 것들을 머리에 담아 단순 낱말이나 문장으로 써서 평가받는 것에 거치지 않는다. 직접 몸으로 드러낸다. 말하고 듣고, 느끼며, 표현하는 모든 것이 평가 방법이다.

 

평가의 목적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주고 덧붙여주는 데 있다. 어느 한 시기 한순간의 평가 한 번으로 아이의 학습 능력을 결정지을 수 없다.

아이들은 꾸준히 성장한다. 성장 속도만 다를 뿐이다. 몰랐던 지식이나 내용, 방법이 평가를 거쳐 새롭게 깨치기도 한다. 그래서 평가는 과정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평가가 아이의 성장을 돕는다.

평가의 역할은 결국 아이의 성장을 돕는 데 있다. 아이의 학습 동기, 학습 의지를 꺾는 평가는 나중에는 학습을 포기하게 한다. 아이마다 서로 다른 학습 속도, 이해의 폭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정도를 측정해서 기록하면 그게 과정 평가다. 그 평가 결과를 학부모에게 통지하여 아이가 한 걸음 더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교육과정-수업-평가는 가르치는 교사 처지에서도 일체화가 되어야 하지만, 배우는 아이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많은 학부모와 교사가 분절된 교육과정-수업-평가, 단순 지식 일제식 평가, 가르침 중심 수업, 결과 중심 평가, 어른 중심의 평가에 익숙해져 있다.

교육과정-수업-평가 일체화는 아이들보다는 그것을 실천하는 교사, 그것을 바라보는 학부모가 더 어려워할 것이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마음이 앞설 수도 있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즐거워야 꾸준한 배움으로 이어진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많이 아는 것보다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 감정을 학교에서 익힌다. 그래서 학생 중심, 과정 중심의 평가가 필요하고 그런 방향으로 교육과정-수업-평가가 한 줄로 엮기는 일체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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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처럼 살다가신 세 분의 삶

-이오덕·권정생·하이타니 겐지로의 삶과 책-

 

 

이오덕 선생님은 대학 때 책으로 알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는 글쓰기 모임에서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스승님이시다. 권정생 선생님은 동화 공부와 동화책을 읽으면 꼭 한 번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이나티 겐지 선생님 세 분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이름을 듣게 되었다. 앞으로 좀 더 공부해아할 할 분이다.

 

 

0. “아이처럼 살다특별 전시회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제2청사를 열면서 이 세 분의 삶을 모셨다

22일부터 310일까지 아이처럼 살다라는 제목으로 달고 열린다.

예전 서울에서 똑같은 전시가 열렸을 때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가지 못하다가 이번에 우리 지역에 이런 기회가 생겼다. 예전 글쓰기 모임을 다시 하는 기분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이 곳에 오랫동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넉넉했다.

 

경상남도교육청에 새 건물이 하나 더 생기면서, 반은 책방, 반은 전시회 자리로 만들었다. 간단히 차도 사서 마실 수 있다. 북카페다. 손님이 오시거나 점심 저녁 시간에 잠시 들러서 머물다 가기에 좋다.

이오덕·권정생·하이타니 겐지로의 삶을 모은 아이처럼 살다.’ 전시회는 정말 아이처럼 살다 가신 세 분의 삶의 기록들이다.

올곧게 아이들처럼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세 분의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흔적들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앞을 밝혀주신다이오덕,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은 교사였고, 권정생 선생님은 작가다.

 


1. 이오덕

 

이오덕 선생님은 대학 시절 책에서 만났다. 아마 삶의 믿음이 교실이란 책일 것이다. 글을 그렇게 쉽게 빨리 읽으면서도 속 시원했던 기억이 난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단박에 알려주신 분이고, 그 뒤로 이오덕 선생님 책은 모두 사서 모으기도 했다.

 

암굴왕이란 책을 읽고 감동을 하였다고 하셨는데,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책이다. 그 당시에는 외국책이 일본어로 번역되고 다시 우리나라로 번역되면서 본래 작품과 좀 차이가 생겼다. 요즘은 다시 제대로 번영된 책들이 나오게 되면서 그때 나왔던 책(명작이라 불렀던 책들)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은 40대 이후 분들쯤 되겠다.

이오덕 선생님이 동화를 쓰시면서 아동 문학가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이원수 선생님과 인연도 두터워졌다. 이원수 선생님도 우리 지역에 사셨다. 합포만이 보이는 마산, 창원 쪽에 사셨고, 함안까지 직장을 다니셨다. ‘고향의 봄이란 노래는 애국가만큼이 많이 불리고 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책은 나도 있다. 노란 손때가 묻고 표지가 너덜너덜하다. 학교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어른들과 이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교사라면, 아 그 시대 생각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가 보고 듣고 겪어 보았을 불의, 불합리, 비민주적인 삶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상처를 주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 민주화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요즘은 경제 민주화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 같다. 그렇지 여전히 경제만 챙기고 민주화는 챙기지 못해서 민주보다 경제가 앞서거나 민주를 무시한 발전만 강조하는 꼴이라 국가의 정체성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선생님은 이후에 아이들을 살리는 노력으로 글쓰기 교육을 하셨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이다. 그때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생겼고, 내 삶 또한 삶을 가꾸는글쓰기 모임에 뿌리를 내렸다.

 

글쓰기 교육, 우리 말과 글 살리기 운동과 함께 시 정신 유희 정신과 같은 책처럼 평론서에 선생님의 꼼꼼하고 분석, 올곧은 생각이 담긴 볼 수 있었다. 평론가의 길, 아동문학 운동을 펼치셨다.

학교를 나오시고 나서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셨다.

 

내 대학 시절 축제에 한번 우리 학교에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어떤 분인지 몰랐다. 대학 4년쯤에서야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무너미 마을로 옮기고,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전국모임도 한 번씩, 무너미에서 치렀다. 그때 한 번 선생님 모습을 보았다. 그 뒤 몇 년 뒤 돌아가셨다.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책을 웬만한 것을 다 있다. 대부분 글쓰기 모임에서 공부하는 책이기도 했고, 늘 새 책이 나오면 먼저 사 놓고 읽기도 했다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 우리 문장 바로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시 쓰기 이 좋은 공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다. 자주 보고 줄 긋고 보면서 내가 걸어갈 교사의 길을 다져주었다.

 

태어나고 돌아가시기까지 삶, , 고민과 활동을 자세히 풀어놓고 마무리로 연도별로 특징 있는 사진으로 묶어서 다시 정리해두었다. 가지런히 읽다 보면 복습이 된다.

 

돌아가시지 이틀 전까지 일기를 썼다는 선생님의 삶은 우리 글쓰기 회원들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글쓰기 교육을 위해 아이들에게 쓰게 하는 노력보다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서 쓰는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사 모임에서도 스스로 쓴 글 발표하기가 가장 잘 안 된다. 남의 글을 읽고 말하기는 하면서 자기 글은 내놓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몇 년을 해도, 몇 년을 기다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선생님이 모으신 몇만 권의 책보다 하루하루의 삶과 생각들이 글로 남겨져서 젊은이들에게 가치 있는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

 

선생님께서 남긴 유품들 가운데 가장 먼저 펼쳐진 것은 아이들 글이다. 교사 시절 아이들 글을 모아서 문집을 낸 것, 아이들 쪽지 시 모은 것, 직접 쓰신 일기는 지금도 우리 교사들이 실천하고 따라야 할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쓰신 여러 글보다 이런 행동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본받게 한다. 나 또한 새내기 때부터 끊이지 않게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아이들 글을 모으는 버릇도 배운 것 같다. 그것이 선생님은 책이 되고, 시집이 되었다. 내 누리집(땀샘학급운영)도 우리 반 아이들 글이 대부분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 기술적이 부분은 발전했지만, 그 방식과 형태,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 유품들은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아이들을 글을 묶은 것과 글쓰기 교육, 평론 책이다. 그때 쓰신 원고를 볼 수 있다.

 

꼼꼼한 기록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컴퓨터 글자판으로 치우고 있을 것이다. 글자 치기와 저장, 관리가 기술 발전으로 훨씬 편리했지만,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글쓰기, 솔직하고 진실한 자기 이야기 쓰기는 기술발전만큼이나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뒤처지고 있지 않나 의심이 된다.

기술 발전을 해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마지막 전시 글에 담긴 선생님의 마지막 글, 우리 삶도 나중에 이런 날이 올 것이다. 어떤 마음이 들고, 어떤 생각으로 살까?




2. 권정생

 

몽실 언니, 강아지똥, 가난한 삶, 동화, 탑골, 흰 강아지……

권정생 선생님 하시면 떠오르는 낱말이다. 동화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불렀던 이름이기도 하다.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어도 그대로 가난한 삶을 행복으로 여기고 사셨다.

강아지똥이 태어난 때는 1969, 내가 태어난 해다. 올해가 닭띠가 해, 닭띠 해에 태어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 이제는 그림책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웬만하면 다 안다.

권정생 아버지가 소작 농사를 지으면 어렵고 사시고, 전쟁도 겪으면서 평생을 병을 달고 사셨다. 가난한 이웃들의 삶 속에 늘 가슴 사연들까지 담으셨다. 그래서인지 권정생 작품에는 분단 이야기,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몽실 언니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나오기까지 했다. 그 당시 불쌍한 몽실이 보고 많이 울었다. 책을 다시 읽어봐도 몽실이는 볼 때마다 불쌍하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새 아빠를 만나 새 동생을 키워내는 몽실이는 화 한번 제대로 내지 않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산다.

강아지똥에서도 강아지똥은 자기 몸이 다 부스러져 민들레에게 다 주면서 쓸모 있는 삶을 깨친다.

모두 권정생 선생님의 삶, 그대로다. 작품이 바로 자기 삶이었다.

 

 



3. 하이타니 겐지로

 

하이나타니 겐지로 선생님은 최근 몇 년 전에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앞으로 더 공부하면서 살펴볼 선생님이다.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도 아이들을 삶의 중심을 두고 사셨다. 앞의 두 분도 그대로 나름 즐겁게 사는 것 같다.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라는 그림책 때문에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서울에서 선생님 강연이 있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시디만 구해두고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있다.

  


4. 전시회

전시회는 22일에서 310일까지 열리는데, 전시 기간 중 매주 토요일, 일요일에 체험활동을 할 수 있고, 해설도 들을 수 있다. 글쓰기 회원들과 도서관 관련 모임 회원들이 도슨트(전문안내원)을 교육을 받으셨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오덕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으신 편지를 따라 쓰는 활동이 있다. 처음에는 불펜으로 썼는데 볼펜보다는 연필이 낫겠다면서 연필도 준비되어 있다. 아이보다 어른들이 해보면 좋겠다. 요즘은 워낙 글자판으로 많이 치니까 손 글씨를 5분 이상 써보기 쉽지 않다.

 

나이가 드니까(^^) 안녕을 벗지 않으면 가까운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다. 늘 화면을 보면서 일하는 생활이라서 몸이 망가지고 있다. 많은 글을 만들 일이 많기는 한데 내 손으로 쓰는 글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겨움과 관계도 자꾸 줄어드는 시대가 되는 것 같다. 글쓰기도 중요하고 글씨쓰기도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더욱 생각이 든다.

 

책갈피 만들기라고 붙여두었는데 정확히 말해서 책갈피 꽂이 만들기. 책갈피는 책장과 책장이 사이 공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책장과 책장을 가르기 위해 꽂아두는 꽂이라는 뜻도 나와 있었다. 몇 년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붙은 모양이다.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버렸다. 사이와 꽂이가 같을 수 있나? 하도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쓰니까 뜻도 그렇게 바뀌었나?

하여튼 간단하게 책갈피 꽂이 만들어 가질 수 있게 했다. 식구들과 함께 각자 하나씩 만들어 집에서 책 읽는 습관을 들었으면 좋겠다.

뱃지배지로 써야 한다. 잘못된 비표준어다. 왜 자꾸 이런 것에 먼저 눈에 들어올까 싶다. 책을 보고 등장인물을 그려본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얼굴과 글로 만들어보았다.

 

그림 따라 그리기는 투명 필름을 그림책 위에 올려두고 그대로 따라 그려서 만들어보기다. 그대로 선을 따라 그리기 때문에 쉽게 그려진다. 다 그리고 어울리는 바탕색 종이를 붙이면 완성!

 

전시 설명은 2월 중 수요일, 목요일 하루 두 번(오전, 오후) 들을 수 있다. 이오덕은 풀빛, 권정생인 노랑, 하이타니 겐지로는 파란색으로 구분해 두었다. 이 세 분을 모르시는 분이고 그냥 눈으로 슬쩍 지나 가버리면 10분도 안 걸리지만, 책을 좀 읽어보셨거나 이 세분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공감하거나 공유했다면 한 곳에 서서 10분도 넘게 걸린다.

 

세 분의 유품도 함께 전시되었다.

 

 

세 분의 삶을 모아보니까 공통점이 많다. 아이들 곁에 돌아오거나 아이들 곁에 맞은 눈높이로 살아오셨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다시 아이들 곁으로 남기셨다.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지금 어른들에게도 깊은 성찰의 시간 여행을 하게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 보면서 산다. 우리 어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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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선생님! 아이들 다모임에서 나오는 의견이나 토의 내용을 들으면 답답해요. 차라리 그냥 예전처럼 내가 이렇게 저렇게 일러주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이렇게 놔둬도 돼요?”

 

우리 학교는 회의가 많아요. 자주 회의를 하는데 결론은 안 나고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해야 해요? 어른들은 이런 회의를 싫어하는 눈치인 것 같고…….”

 

이런저런 연수를 받아 학급에 적용 실천해보면 잘 안 돼요. 나만 그런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성향이 맞지 않는지? 늘 고만고만한 말만 반복해요.”

 

모임과 회의, 토론, 실천도 자꾸 하면서 오르내리기도 빠르고 늦게, 멈추기도 하면서 성장한다. 그 성장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어떤 모양일까?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는 순간, 그 출발 지점은 어디쯤일까?

꾸준하게 오르는 성장일까, 멈춰지는 시기는 없을까? 내려가는 시기는?


위 그래프를 보자.

직선형(란선), 곡선형(붉은 점선), 내려가다 오르는 곡선(초록)으로 세 가지 형태로 그려보았다.

직선형(파란선)은 수학 공식 같은 성장 곡선이다. 기계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하다. 곡선형(붉은 점선)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점점 가파르게 오르고, 내려가다 오르는 곡선(초록 곡선)은 바닥 B 지점을 치고 나서 오르는 모양이다.

 

우리 삶의 성장은 내려가다 오르는 곡선(초록 곡선)이라 본다.

모임, 회의, 협의, 습관 형성도 이런 곡선처럼 성장하는 듯하다. 첫 마음이 A에서 출발하여 바로 직선형이나 곡선형으로 뻗지 않는다. B 지점까지 내려간다. 바닥을 찍는다. AB 구간(연두색 영역)을 혼란스럽고 효율적이지 못하고, 말만 많고 결정을 짓지 못하며 배가 산으로 간다고 여길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다가 BC 영역(연주황색)에서 점점 오르기는 하는데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우리 삶에서 AB 구간을 불필요하다고 여기거나 못 견뎌 한다.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직선형, 곡선형 성장이 되지 않으면 협의와 토의가 필요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 경험이 학습되어 삶의 가치관으로 굳어지기까지 한다.

C 지점을 넘어 좀 더 나아가면 반드시 성장의 기쁨과 성취감을 얻을 것인데 이 두 고비를 넘기지 못하니까 결국 협의와 토의 과정을 믿지 못하고 불필요한 행위로만 여길 수 있다. 믿지 못할수록 ABC 구간이 길어진다. ABC 구간을 늘 맴돌기도 한다.

이 구간을 넘기는 데는 철학과 신념이 필요하다. 많은 교사 모임이나 단체도 이런 고비의 단계를 넘기지 못하니까 1, 2년 이내에 사라지고 만다. 오랫동안 모임을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ABC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믿기에 기다릴 수 있다. 그런 마음 씀씀이로 길게 보고 꾸준히 이어가는 내공이 생긴다.

 

AB 구간은 껍데기, 거품, 허물을 벗는 시간, BC 구간은 새 살이 돋는 기간이다. C 지점부터 새롭게 넓혀지면서 성장하는 기간이다. 가속도 붙는다. 공짜는 없다. 진정한 성장은 자기 껍데기를 벗는 것부터 시작이다.

모임이나 협의도 먼저 잘못된 상식, 오류, 편견, 고정관념을 벗는 것부터 시작이다. 토의, 협의, 토론 과정에 감정이 상하거나 의견이 다툼만 있어서 아예 회의를 거부거나 피해 가려 하기도 한다. AB 구간이다. 어렵게 힘들게 이끌어가거나 딸려가다가 B 지점에 다다르면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말이 나오거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고 AB 구간의 과정을 헛되이 보냈다고 아깝게 여길 필요가 없다. AB 구간을 겪으며 B 지점부터 교육 본질에 대한 생각의 공유, 마음, 철학을 함께 갖게 되고, 공통한 목표에 가까워진다. 공동체의 철학적 공유가 일어나는 지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ABC 구간은 서로의 마음과 철학을 한 길로 잡아가는 시간과 경험의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AC 지점은 같은 높이지만 구성원 간의 관계, 자기 내면의 동기 형성에 큰 차이가 있다.

 

이렇게 바닥을 찍고 오른 다음 성장 과정을 보자. 구성원, 집단, 내면의 동기를 튼튼해지고 나서 일정한 곡선 형태로 성장하는가, 층계형으로 성장하는가?

C 지점 까지는 진솔한 자신의 발견, 교육본질에 대한 철학적 공유 단계다. CD 기간을 어떻게 성장하는지 성찰해보자.

내가 보기로는 어느 정도 정체되다가 어느 지점(1,2,3)에서 층계 오르듯이 성큼 큰다. 그러다 또 정체되었다가 또 한 층계 오른다.

성큼 오르는 부분(1,2,3)은 임계점이다. 물이 끓기 위해서는 100도가 되어야 한다. 99.9도까지는 열을 한창 올렸다가 100도 되었을 때 끊는다. 끊기가 1도에 조금, 10도에 1도의 10배만큼, 100도에 10도의 10배만큼 끊지는 않는다. 끊는점 까지 충분히 열을 올라야 한다. 1,2,3부분을 오르기 위한 정체기는 이른 끊는점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 단계다. 그래서 가까운 목표(1,2,3)를 설정함 꾸준히 애를 쓰는 것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도 이런 층계형 성장 곡선처럼 성장한다. 그래서 아무런 성과 없는 결론이 나더라도 꾸준히 회의하고 모여서 결정해보고, 고쳐가면서 노력한다.

어느 정도 집단의 합의, 공동체의 목표가 세워지면 또 자꾸 모여서 열을 올려야 한다. 임계점에 다다른 어느 한 지점을 겪으면 성취감도 높다. 그러다 또 정체기를 겪으며 열을 올리고 두 번째 임계점에 다다르면 더 큰 성취감과 성장의 기쁨을 함께 느낀다. 갈수록 정체기가 줄어들고 임계점의 높이가 높아질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겪고 나면 굳건한 신념과 철학이 된다. 물고기가 물속에 물을 못 느끼듯, 공기로 쉬면 쉬듯 새로운 문화, 생활 속 문화가 된다.

우리 삶, 모임, 단체, 학교, 학급이 이렇게 성장하는 것 같다. 한평생이 걸리기도 하고, 어떤 문화는 이미 한 세대가 C 지점까지 만들어준 상태에서 열을 올려야 하는 지점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오늘날 우리 학교, 우리 선생님들, 우리 아이들은 어느 지점에 모여 있을까?

A 지점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B, C 지점에서 성장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A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여기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ABC 과정을 겪는 것과 겪지 않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힘들고 어렵고 귀찮고 답답한 과정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과정이 정확한 자신, 남을 이해하는 가치관, 아이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다양한 과점을 배울 수 있는 시기라고 본다. 또한, 이런 과정이 임계점에 다다를 수 있도록 열을 올리는 훈련이고, 연습이며 체계를 잡는 성찰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도 성장한다.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세상도 그렇게 성장하면서 우리를 성장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각자 다른 생각을 지니고 모여서 갈등의 순간(AB 구간)에 만난다. 부대끼며 다투고,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을 보게 된다. 다름이 틀림으로 해석하고 다툼이 일고, 그러다가 틀림이 아닌 다름이란 것을 깨닫고(BC 구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C)을 함께 갖게 된다. 여럿이 한뜻으로 한고비를 넘기면 첫 성취감(1)에 다다르고, 이 맛에 또 다르게 넓히며 다른 사람과 함께 이뤄내고(2), 이뤄낸 것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더 많은 사람, 이웃, 공동체와 더불어 제도와 규칙까지 만들어내면서(3) 진정한 민주적인 의사결정 공동체로서 구성이 되고, 그런 사회 문화가 숨 쉬는 공기가 된다.

 

우리 삶, 우리 이웃, 우리 학교가 이렇게 성장한다고 믿는다. 먼 길 함께 가는 사람들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우리 성장도 오래 함께 가는 길이다. 한순간 임계점으로 오르기 위한 편법, 우연, 악용은 열을 올리지 못하고 얻는 결과다. 다음 임계점이 힘들어진다. 오래가지도 못한다. 협의, 토의, 갈등, 조정의 경험이 없는 성장은 열을 올려보지 못한 우연, 편법의 결과다. 오래가지 못한다. 한두 개의 임계점에 남의 힘을 빌리거나 권력의 힘으로 올라갔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혼자만 남아 머물게 된다. 멀리 가지 못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우리의 촛불은 ABC 구간을 지나서 스스로 깨닫는 순간(C)을 찾았다는 것으로 생각해 본다. 자각만 했다고 바로 성장 곡선의 위를 오르지 않는다. 좀 열을 내어야 한다. 진정한 출발점(C)에 서 있거나, 한 임계점을 넘었을 뿐이다.

Posted by 참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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