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초청 공개 수업 날이었다. 수업 전 복도에서 학부모를 모아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

공개 수업에서 수업을 보십니까, 아이를 보십니까?”

솔직히 아이를 본다는 의견이 많다. 부끄러운 듯 꺼내신다물론 둘 다 본다. 교실 뒤에 앉아 지도안대로 하는지 살피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가 잘 따라하는지 신경 쓰인다. 눈이 쏠린다. 이게 보통 학부모의 수업 참여 형태였다.

따로 학부모에게 공개 수업을 보는 방법이나 기준, 관점, 취지에 대한 연수나 공부가 드물다. 그래서 공개 수업이 행사같은 느낌이다. 아이와 함께 학부모도 덩달아 평가받는 듯해서 선생님 눈치를 보기도 한다. 이런 공개 수업 날에는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 서로가 잘 해보이거나 잘 했으면 하는 기대와 긴장감이 감돈다.

 

두 번째 질문,

손들어 발표 하는 아이, 듣고 따라하는 아이, 모둠끼리 잘 어울리는 아이가운데 어떤 아이가 잘 하는 걸까요?”

우리 아이가 발표를 잘하느냐는 말이 학부모 상담 때마다 자주 나오는 걱정 가운데 하나다. 공개 수업에서 자기 아이에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아이의 무엇을 볼까?

수업 마치고나면 발표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 묻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손들어 발표를 했는지 잘 했는지에 평가 관점을 두기도 한다. 혹 내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면 괜히 교사에게 죄송한 마음도 내비친다. 아이들 마음도 비슷하다. 공개 수업을 아이나 수업, 교사, 학부모의 평가 관점으로 보는 듯하다.

 

공개 수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왜 공개 수업을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과 기회의 시간이 흔치않다보니지도안대로 그대로 진행되는지 평가하듯이 훑어볼 수밖에 없다.

학부모에게 공개 수업은 자기 아이의 학습 방법, 참여 상태와 학습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어떻게 수업에 참여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풀어 가느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학부모의 공부 시간인 셈이다.

모둠 활동에서 토의를 이끄는 아이, 나서서 발표하기를 좋아하는 아이, 주로 듣는 아이, 친구와 의논할 때 활발한 아이, 잘 듣고 기록하는 아이, 신중히 탐색하는 아이와 같이 다양한 성향이 있다. 어느 아이가 잘 한다 못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평가를 해서도 안 된다. 외향적인 아이는 말이 앞서고, 내향적인 아이는 말을 아낀다. 실수하며 배우는 아이가 있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준비시간이 긴 아이도 있다. 무슨 말인지 의미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아이, 활동에 몰입하지만 왜 하는지 모르는 아이, 안 듣는 것 같지만 이해하고 움직이는 아이, 몰라도 눈치껏 따라하는 아이도 있다.

공개 수업은 이런 아이들의 학습 성향, 습관, 방법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공개 수업은 결과 발표 위주보다는 오히려 평소 수업다워야 한다. 또한 자주 열고 자주 보러 와야 한다.

수업 뒤에 아이와 수업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학부모가 눈엔  다른 친구와 이야기 하느라 교사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때 상황을 말해보면 알아듣고 친구와 의논했을 수도 있다. 친구 이야기를 잘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말인지 몰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공개 수업에는 답 맞추기식 수업도 많다. 미리 토론, 조사한 것들 말하기인데 대부분은 틀린 답은 없다. 답을 확인하는 방식인데 이미 아는 답, 준비된 답을 드러내는데 신경을 쓰게 된다. 목소리나 발표 방법, 보이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진다.

정작 아이들이 배우는 과정은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이 배우는 과정을 보려면 모르는 것이 나와야 한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애매모호한 상황이나 개념이 나와서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과정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 과정을 어떻게 해결하고 누구 도움을 받으며, 어떤 관계를 맺으면 푸는지 살펴봐야 도움을 줄 수 있다.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아이나 학부모가 모두 이런 상황을 당황스럽거나 익숙하지 못해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드러나지 않다면 일부러라도 나오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 상황을 미리 학부모에게 일러두고 잘 관찰해게 하면 재미도 있다. 아이들이 하나의 개념을 알기까지 거쳐야하는 고민의 과정이 보인다. 토의를 이끄는 아이, 무작정 자기 답이 맞다고 우기는 아이,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듣기만 하는 아이, 사전을 찾아서 조사해보려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탓할 상황이 아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았다가 가정이나 학급에서 도움을 줘야한다. 독서력, 평소 대화나 상식이 모자랄 수 있다. 문제 상황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는 문해력이 낮을 수도 있다. 친구 눈치 보거나 충분이 알아도 말 못할 수도 있다. 자존심 때문에 뚜렷하지 않는 의견을 우기기도 한다.

 

문제 해결 상황이 아이나 학부모에게 긴장시킬 수 있지만 드러내서 공유해야한다. 부끄럼, 눈치, 잘 보이려는 마음이 오히려 배움을 방해할 수 있다.

학교에 모르는 것을 배우러 온다. 수업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교사가 던져 놓고 외우기만 하는 그런 방식은 이제 지금의 학부모 세대에 끝을 맺어야 한다. 머리를 맞대어서 풀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 결과가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풀어내는 과정에서 서로의 협력과 관계, 동의, 양보도 함께 익힌다. 사회적 활동과 관계를 통해 모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도전과 용기가 생기도록 하는 역할도 배움의 중요한 요소다.

 

수업에서 지식 자체를 얻기도 하지만 지식 습득 방식도 익힌다. 수업을 본다는 것은 모르거나 애매한 또는 새로운 지식을 어떻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실수와 실패, 오류가 따른다. 이런 과정이 나와야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꾸중의 대상이 되면 학습에 대한 동기와 도전이 꺾이고 공부의 즐거움이 사라진다. 공부를 참고 이겨내는 대상으로 여겨  언제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는 손을 내려놓고 만다.

수업에서는 아이들마다 당연히 잘하고 못하는 차이가 드러난다. 수준이 높고 낮은 아이도 있다. 수업 내용에 따라 차이가 높기도 낮기도 한다. 다른 애보다 더 많이 알아서 빨리 답해서 생각하지 않은 발표도 될 수 있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틀려도 좋다. 오히려 틀리는 편이 좋다. ‘틀렸다는 것에 주눅이 들고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면 맞는 답만 보이려는데 신경 쓰이게 되어 질문이 사라지기도 한다.

틀리면 과정을 밟아가면 된다. 맞은 답이라도 과정 속에 애매한 부분을 드러내어 따져보면서 원리를 튼튼히 해야한다. 틀린 애들이 왜 틀렸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서로가 배우고 깊이와 넓어지는 맛을 찾아는 기쁨, 배우는 기쁨일 것이다.


공개 수업의 의미가 무엇인가,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한번 되짚어보자. 공개 수업에 참여하기 앞서 학부모들과 함께 공부할 시간에 중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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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조사 학습이나 보고서 과제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시키면 컴퓨터 글자판의 Ctrl+CCtrl+V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 무엇을 찾으려면 이제는 거의 인터넷 검색하는 방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우리말과 외래어, 환경 문제, 토론 문제 따위를 찾을 때도 가장 먼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사전이나 신문, 백과사전도 이제 인터넷 안에 다 들어가 있다. 교과에 나오는 여러 가지 조사와 보고서 활동은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모으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 아이들은 손쉽게 필요한 정보를 복사하기와 붙이기 기능을 활용하여 눈으로 훑어 보며 끌어 모은다. 모으기 쉽게 되어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런 수준의 방법까지에만 머문다. 대부분 조사와 탐구 보고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가 복사해서 붙여서 정리하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 정도라도 해오면 다행일 때도 많을 것이다. 모은 자료가 많다 싶으면 간추려 줄이거나 글꼴을 줄여서 채우는 편집 기술을 부리기도 한다.


 제대로 참고하는 일이 없다. 참고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참고한다는 의미가 뭘까? 정보 찾기가 답을 찾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보니 끌어 모은 자료의  글꼴, 색깔, 그림으로 꾸미는데 더 신경을 들이기도 한다. 겉꾸밈에 시간과 노력이 낭비가 된다. 이런 노력이 낭비라 생각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로 보인다. 프레젠테이션 할 때도 애니메이션 기능과 효과음을 잔뜩 넣어서 기교를 부리는데 정성을 들이는 모습도 본다.

내용을 소화하지 않고 주워모아 보여주기만 하니 질문이 없을뿐더러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도 드물다


조사한 내용이나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할 때에 주로 보고 읽는다. 발표가 아닌 보고 읽기 되어 버린다. 답 맞히기 식 읽기는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도 못한다. 발표는 상대를 이해시키거나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하지 않고 보고 읽기를 고칠 기회를 갖지 못하면 보고 읽기가 발표로 여기면 졸업하게 된다. 잠재된 과정관념으로 굳어진다. 


참고하려면 우선 자기 생각과 주장, 경험 따위가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 주장, 경험을 뒷받침할 근거나 자료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논리로 발전한다. 조사한 자료가 그 논리의 한 부분이 될 때 읽기가 아닌 말하기가 된다. 말한 것에 따른 근거, 증명 자료도 보인다. 짧게 읽어줄 수도 있다. 그런 말과 읽기는 듣는 사람도 집중하고 호기심과 관심도 생긴다.

 

답 맞추기식 문제 풀이의 습관과 폐해가 이런 활동에서도 드러난다조사, 보고서 만들기, 프레젠테이션은 한 학기에 한두 정도는 할 것이다. 발표가 보고 읽기, 답 말하듯 읽기을 고치지 못하면 제대로 참고한 경험이 적어 복사해서 붙여 간추리기를 발표 방법으로 착각하여 학습이 되버립니다.


제대로 조사해보면 분류, 요약, 종합, 분석의 과정이 일어난다. 고급사고다. 그래야 발표 거리가 생기고 자기 삶과 경험이 중심이 되어서 머릿속에 담긴 의견을 말한다. 말하기, 발표다. 스스로 만든 정보이고 말하면서 살을 붙이거나 속도 조절도 가능하다. 이런 상태는 외운 정보와 구분된다. 외운 것은 말하기보다 읽기가 되기 쉽다. 남의 지식이니까 순간 기억에 담았다가 끄집어낸다. 단답식 답하듯이 읽는다. 그 뒤 쉽게 잊는다. 정보 주체가 자기냐 남이냐에 따라 생각하며 말하기가 되거나 보고 읽기가 된다.

 Ctrl+CCtrl+V가 편리하지만 우리 기억 까지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읽은 그대로 기억되지 않는다. 곱씹어야 한다. 자기 경험과 생각에 의견을 보태어 비판, 종합, 분석하면서 의미와 가치를 붙여야 한다. 복사한 것에 의미 있는 생각, 행동, 감정이 덧붙으면 쉽게 오래 기억되고 다시 살아난다.

 

참고냐, 간추리기냐?

보고 읽기냐, 생각하며 말하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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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한송이에
씨는 여러 개
하나 하나 떨어져
홀씨가 되어
바람에 몸을 싣는다.

어디를 가는지
어디에 닿을지
어디로 거칠지
묻지마세요.

채우지 않고
깃털 하나에
온 몸 그대로 맡겨요.

걱정도
근심도
욕심도
담지 않아야
훌훌 멀리 멀리 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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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냥이

시 쓰기 삶 쓰기 2015. 9. 26. 16:04

우리집 풀밭에 사는 길냥이들
배고플 때마다
냥옹냥옹
일곱마리

땅구멍 사이로
잠자고
문 여는 소리에 솔깃하여
우르르 몰려들어
멀꾸미 쳐다보다
냐아오오오옹
나야오오오옹
밥줘요오오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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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생활보고서

한국인이 하루 책 읽는 시간 6분, 5년 전보다 1분 줄었다.

하루 10분 이상 책 읽는 사람이 10명 중 1명이란다


글을 써야겠다.

깨어있기 위해

살아있기 위해

나를 적는다

나를 본다

나를 다듬어 본다


서툼은 당연한 것

서툼은 배움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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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각종 대회 종류

1. 폭력 예방, 다문화 캠페인, 흡연 교육, 독도교육, 경제교육, 


2.그림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저학년 그림 그리기, 상상화다

요즘은 글쓰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글짓기 형태에 머물고 있다. 글쓰기는 이름만 그렇게 바꾸었을 뿐이다.

포스터이다.


이런 활동으로 아이들이 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적 내기 좋은 활동과 자료.

이런 활동을 했으니 예방된다는 관념은 언제부터 였을까?

어른들의 착각, 보여주기 위한 교육, 했다고 한 것 처럼 '척'하는 교육.

이런 활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잃게 만들까?

얻는 게 말을까, 잃는게 많을까?

얻는게 많았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오히려 잃는게 많은 시대가 아닐까?

지금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부는 세대가 받았던 방식은 그대로 되물림을 주려고 하는게 아닐까.

현재의 재미보다는 미래를 준비와 참을성을 더 강조하고 


문제점, 어른들의 시킴으로 해내기는 해도 나중에 스스로 하지 않는다. 재미와 필요성을 스스로 찾을 기회와 경험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재적 동기가 아닌 외적 동기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런 결과물이 나오니까 내면화되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어른들과 아이들이나 이렇게 늘 하고 왔으니 고착화되어 간다. 잠재적 학습이 


그림그리기, 글짓기, 포스터 

아이들이 선택해서 하기보다는 대회용, 실적용 과제로 내어야하는 자극이기에 스스로의 자극으로 불러일으키는 동기로 자라지 못한다.

자기주도, 지속가능한 학습의 경험이 아닌 벗어나고 싶은, 스스로는 하고 싶지 않는 방법으로 마음 속에 담기게 된다. 

이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호가 많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질려 버린 것들이 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일기쓰기(글쓰기)를 포기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읽기(책)를 포기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사회인, 직장인이 되면서 말하기를 포기한다. 쓰기를 배웠어도 쓰기를 포기고, 읽기를 배웠어도 읽기를 포기하고, 말하기를 배웠어도 말하기를 포기한다. 

포기하는 교육이 아니었나.

결국 길들여진 교육에 남은 것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삶이 오히려 편안함의 족쇄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 편하고, 생각없이 마구 먹고, 쓰고 노는 것이 편안 것이 된다. 스스로의 생각 시간이 어색하고 불안하고 무엇을 해야할 지 부적응이 되어서 오히려 조용함이 불안감을 준다. 자신을 돌보는 시간의 부적응,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귀찮음, 혼란스러움의 속에 자신을 숨어버리는 것, 술이나 담배, 수다 속에 자신의 잊혀지게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라고 여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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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나온 것인가, 넓힌 것인가

 

장학사로 나온지 석달이 지나간다.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지낸 삶과 교육행정하는 자리는 다르다. 차이가 난다. 

현장에 있으면서 내려오는 공문과 지시 사항에 늘 불만과 답답함을 토해내었다.  '교육행정'을 바라본 눈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교육 행정의 자리와 기관에 있어보니 여러가지 차이점과 희망도 함께 보인다.

 

아이들이 공부하면서 수업 준비, 아이들과 소통, 동학년 선생님, 학부모, 교사 공부 모임과 같은 사람과 관계가 학교 현장에서 중요했다. 교육행정은 '행정'에 초점이 짙다. 그래서 행정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 민원 대응에 민감하다. 학교 현장이나 도민들 의견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일이 많다. 관계 회복이나 관계 맺기와 같은 소통의 과정보다는 문제를 풀어야 할, 풀어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로 힘든 나날을 겪고 있다. 그래서 외로워진다. 하루 내내 컴퓨터 모니터랑 글자판으로 글을 주고 받는다. 아무런 문제 없는 일 처리가 목표점이 되어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담당 업무에 따라 생활 리듬도 차이가 난다. 정확하고 빠른 업무리 처리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장학사이런 업무와 소통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과 노력이 들여야할 '장학'이란 일도 있다. 행정 업무는 정해져 내려오지만 장학은 어찌보면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할 일이기도 하다.

장학, '학교교육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교육작용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지도·조언하는 전문적인 기술봉사'라고 사전적 의미가 있다. 지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져 그 본래 목적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고민이다.

 

'나눔'과 '본보기'란 말로 풀어가고 싶다.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리(교실)에서 나왔지만, 내 마음에는 늘 현장이 다 교실이다. 수업을 이제 그만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교실은 더 넓어진 개념으로 다시 정의를 내린다. 나와 한해 동안 같이 할 아이는 없지만, 내가 찾아가야 할 아이와 선생님, 모임이 더 많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내 마음도 편하다.

 

22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경험과 기운, 느낌은 아직까지 그대로 살아있다. '교육행정'은 배우며 익혀 나가고, '장학'은 수업과 모임 나눔으로 만들어가야겠다.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시간이 걸린다. '장학사'라는 고정된 관념과 이미지를 희석시키거나 유연하게 하려면 꾸준히 반복된 모범과 변화가 이어져야겠다. 학급에서 '수업'이 아이들에게 즐거움과 자기 꿈을 찾는 일이라면 학급을 벗어난 '수업'에는 여럿이 함께 문화를 가꾸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겠지.

 

어느 자리와 직책에 있던 '수업'한다는 마음을 지켜나가고 싶다. 

교사는 수업으로 성장한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눈빛, 마음, 웃음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이어간다. 내 학급, 우리 학년, 우리 학교, 우리 교육이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러면서 여럿이 행복해지는 문화가 만들어진다. 나 개인이 앞서가는, 빨리 갈 수 있는 속도와 기회를 지녀도 여럿 사람이 함께 한 걸음을 딛는 어울림과 맞춤이 필요하겠다. 앞에서 이끌거나, 뒤에서 밀기보다는 반 걸음 앞에서 방향을 일러주고, 같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를 지키는 노력도 중요하겠다.


교실이 넓어졌다. 성장하는 만큼 우리 세상도 넓어진다. 

만남은 늘 새롭다. 같은 사람과 같은 자리에 만나더라도 새롭다. 

배움은 성장이다. 배울 수록 세상은 좁아지기보다 더 넓어진다 

새로움은 벌써 내 안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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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도 학급에 선택할 수 있어야

- 가르침보다 배움 중심으로-

 

교육청에서 내려 보내는 공문 형태는 여러 가지다. 교육부 공문을 그대로 건네 결과물(국회의원 요구자료, 교육과정에 시수 확보라는 내용 등)을 내거나, 시범·우수학교 선정이나 교과에 꼭 몇 시간을 넣으라는 공문도 있다. 이런 공문들은 학교 현장에서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해야 한다. 또 교육 행사를 안내하는 정부와 각종 다른 기관과 단체들 공문도 있다. 협조나 홍보 공문은 공문 게시나 교직원, 학부모들에게 안내하거나 희망하는 사람들만 참여하도록 한다.

크게 잡아 이런 세 가지 정도다. 받아들이는 학교 처지에서 보면 모두 같은 결과물을 내어야 하는 공문으로 여기기 쉽다. 더군다나 홍보나 안내, 희망자에 따른 참여 안내 공문도 몇몇 분의 단독 판단으로 학교 단위의 의무 행사로 바뀌기도 한다.

조사해서 보고하는 공문은 담당자가 처리하겠지만 행사를 치러야하는 실적은 전체 학급에 영향을 미친다. 교과 시간을 빼앗아 버리거나 수업 흐름의 맥을 끊어놓는 잡무라는 괴물이 되어버리기 한다. 생각지도 않는 행사가 또 생겨서 괴롭힘을 받는다는 느낌이 쌓이고, 비록 행사를 치루기는 해도 불편하고 불평스러운 행사라서 빨리 끝내는 것에 목표점을 둔다. 이렇게 받아들인 행사의 교육적 효과는 오히려 역효과로 뿌리내리게 된다.

 

안전, 학교폭력, 성교육, 독도교육, 다문화, 국제 이해 교육과 같은 실적을 내어 보고하라면 캠페인, 외부인 초정 강연회, 학예 행사(글짓기, 표어, 그림 그리기)와 같은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 해오던 전시성 행사이지만 이런 방식 말고는 해본 경험이 없고,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서 왜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해서 맞춰주는 정도의 참여만 이루어진다.

권고, 안내, 선택 가능한 행사도 업무 담당자나 관리자의 참여 지시(본인은 지시가 아닌 권고 수준이라지만)에 따라 의무 행사로 바뀌기도 한다.

 

보고 공문이든 선택 가능한 행사이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학급의 교사나 아이들이 아니다. 따라야하는 행사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율성을 내어볼 기회가 없다보니 책임과 내용성 있게 참여하기보다는 행사를 빨리 치른다는 것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행사와 교과 활동이 융화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움직이게 된다. 분리되어 운영하다보니 늘 교과 시간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잦은 행사로 교과 시간을 빨리 조절해야하는 촉박함을 가지기도 한다. 진도를 빨리 빼야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학급에서 보면 이런 행사가 본래 취지가 좋고 나쁨을 떠나 잡무로 느껴지기 쉽다. 수업의 흐름과 맥을 끊는 방해 요소가 된다. 행사의 본래 취지는 틀림없이 좋은 의도와 뜻, 요소가 담겼다. 그런 요소들이 시기 문제지 결국 학급에서 언젠가는 다루는 교과와 생활 지도 요소이기도 하다.

행사를 학급에서 선택해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사를 교과로 끌어들여 재구성할 기회마저 막히거나 잃는다. 참여에 뜻이 있는 교사나 학급에서는 나름의 기획과 아이디어, 참여 방법에 대한 의논과 토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교육 효과가 높다. 이른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이 학교 교육과정을 기획, 운영, 관리하는 사람에게 필요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철학적 소양을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철학적 공유를 위한 시간, 의견 나눔, 소통이 회의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소통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교사들도 배우고 성장해야한다. 소통하는 배움이 필요하다. 서로의 생각을 모으고 큰 목표를 함께 만들어 공동의 책임감으로 주체적인 삶의 노력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하겠다.

 

주어지거나 해야 하는 행사, 몇몇 사람이 결정한 행사는 비록 하기는 하겠지만 교과와 섞이지 못한다. 빨리 치르려는데 목표점을 세워 행사 본래의 목적이 옅어지고 영향력도 떨어진다. 학교의 민주성은 교직원들과 의논해서 학급(교사와 아이들)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는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율성을 살리는 씨앗이다.

 

학교 실적이 학급 수업과 교육 흐름을 끊어서는 안 된다. 행사가 교과에 함께 어울려 재구성하여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치러질 때 행사 본래 목적도 함께 산다.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학교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닌 분이 많으시다. 학교 차원에서 무엇인가 했겠지만 그게 학급에 어떤 영향 있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드러나지 않는다. 행사 치루고 무엇인가 배웠다, 재미있었다, 좋았다, 다음에 또 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몇몇 아이들에게 이끌어 낼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진실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해야 할 행사를 말고도 학교마다 교육과정에 따라 치루는 행사가 많다. 교육과정에 있어서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된다. 이런 행사들은 행사와 교과를 융합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교과로 우려낼 기회가 된다.

물론 학교 구성원들 분위기에 따라 이것 또한 지시, 의무, 동원되기도 한다. 서로 의논해서 행사가 배움의 잔치 분위기로 이끄는 학교도 있다. 두 경우 다 결국 한 행사를 치렀다는 결과는 똑같지만, 그 과정과 분위기, 아이들과 교사의 자율적인 참여, 배움과 성장, 자율성, 책임감 따위에는 틀림없이 차이가 난다. 구성원들이 안다. 행사를 소비했는가, 성장의 배움이었는지. 배움 중심이란 말에는 이런 선택 기회, 자율성, 책임감이 어우러지게 의논하고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녹아 있다. 담고 녹아내는 실천 중요하다는 것을 다 함께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외적 동기에서 벗어나 내재적 동기로 성장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내재화가 되면 문화로 살아남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스스로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관습이 된다.

 

가르침에서 배움 중심 수업을 하자는 말을 자주 한다. 학교와 교사의 소통과 회의 과정도 배움 중심이 되어야겠다. 일과 결과 중심 행사보다는 참여하여 함께 만들고 고민하는 과정 중심이어야겠다. 선택하는 사람은 책임 있게 실천한다. 기회를 주어야 주체적인 참여를 한다.

성과 중심의 유혹을 떨치고, 다른 학교와 경쟁, 학교와 교사 평가 지표를 채우려는 욕심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평가 지표는 외적 자극들이다. 외적 자극에 길들여지면 결국 그것이 없을 때는 스스로 목표점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욕심을 비우면 아이들 마음과 눈이 보인다.

Posted by 참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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